지하철을 타면, 가끔씩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 않은 사람이 몇명인지 세어보곤 한다. 놀랍게도 한 명도 없거나, 전체 칸에서 나 포함 두 명 정도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카톡, 웹소설, 뉴스, 폰게임, 스포츠 중계 등등. 그런걸 안좋게 본다거나, 그러지 않는 스스로를 쓸데없이 대견히 여기지는 않는다. 그건 꼰대도 뭣도 아닌 그냥 우월감에 사로잡힌 별종일 뿐이니까. 일상이 치열해서, 저렇게라도 짬짬히 얘기하고, 보고, 놀고 해야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냥 사람은 심심한 것을 못 참는 건가 싶기도 하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사람이 자지 않고 깨어있는 동안은 절대 생각의 공백이 발생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은 어떻게든 생각의 ‘대상’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에 대해서’가 없는 생각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렇게 따지면 나도 그냥 내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 않을 뿐, 남들이랑은 좀 다르고 독특한 대상인 ‘남들’을 관찰하며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굳이 지금의 직업뿐 아니라, 대학에서 전공을 정했을때부터, 재무직으로 일을 하거나, 이후에 음악으로 밥벌어먹는 일을 하면서도, 나는 현실감에 목말랐다. 재무, 음악, IT, 심지어 취미마저도 가상현실. 본업이었던 것들과 주된 취미마저도 나라는 본체의 절반인 머리, 즉 관념의 레이어에서만 이루어지는 활동들이었다. 그래서 내 본체인 몸이 움직이는 현실, 그 현실감이 그냥 필요했다. 현실이 더 좋다거나, 없으면 안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느낀 건 아니다. 다만 직업이든 취미든 그런 관념의 세계에만 묶여있다보니, 내 몸이 직접 이동하며 느끼고 부딪치는 일상,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 길에 비치는 낮과 밤의 빛깔들, 거기서 들리는 소리들의 가치가 굉장히 한정적인 시간 안에서 귀해지는 현상이랄까.
어쩌면 저런 스스로의 특징에 대한 자각없이 평생, 혹은 대학때 자각한 이후로 한참을 살다가 노희경 작가의 책을 읽었다. 거기엔 작가는 항상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들고, 거기서 그들을 치열하게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날아가지 않게, 다급할정도로 귀하게 여기며 담아내야 한다고 써있었다. 살짝 소름돋으면서도 (내가) 우스웠다. 누가 보면 작가 하라고 태어난 것처럼, 안 시켜도 이 짓을 평생 해왔다는 건데. 그러기엔 아직까진 너무나도 작가와 거리가 있는 삶을 사는 건 아닌가. 바깥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남의 풍경이나 인생에 관심이 많다. 그냥 그래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들 중 글로 수고롭게 찍어내는 연습을 굳이 손수 거친사람들이 작가를 하나 보다. 내가 그 두 조건의 교집합에 속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