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선후배와 동기들을 우르르 끌고 저녁을 먹으러 갈 때면 항상 되도 않는 마초짓을 했다.
- 선배, 우리 어디 가요?
- 낭풍.
- 또? 아니, 우리도 좀 예쁜데도 가고 하지.
- 지금 열여섯명이 미팅하러가냐. 예쁜데는 이 앞에 가끔 놀러 오는 사람들이 가는거고, 우린 먹고 살려고 먹는 거잖어.
'2차 3차도 다 아저씨 같고 후진데만 갈 거야. 오지 마. 곱게 집 들어가라.'
(이 말을 가장 자주 했던 것 같다)
- 나랑 애들 다 그런거 좋아하는뎅~
- 그러던가 말던가, 와서 인상 구기면 바로 집에 보내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막상 그렇게들 오면 신경쓰였다. 아무 센 술이나 막 퍼먹이는 꼰대 고학년으로 보이기 싫었다. 보이는 것과 별개로, 그런 패악질을 하는데도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절반쯤 여자애들이 있을 때는 물, 과일소주, 청하, 맥주, 그냥 소주 등등 아무거나 각자가 먹고 싶은 걸 시키게 하고 가끔 건배나 하는둥 마는둥 했다. 건배도 위압적인 것 같아서, 원래 각자 따라서 알아서 마시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 10시 30분부터, 대강 어디쯤 사니까 몇시엔 막차를 타야 하는지 얼추 알고 있으니, 순서대로 집에 보내버렸다.
- 아니! 우리 택시타고 갈거라니까, 내가 괜찮다는데, 내가 애야?
- 말 듣지..?
- 그리고 왜 남자애들은 안 보내!
- 저놈들은 길바닥에 굴러댕겨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막 뒹굴어도 안 다치니까.
- 성차별적 발언이야 지금?
- '성차이'를 안전하게 대처하는 중인데. 술 먹는 중에 자꾸 말시키지 마 귀찮게.
- 선배 저희 좀 더 있다가 가도 돼요.
- 그러다 못 가면, 밤새 내장 털면서 술 들이붓다가 밖에서 오들오들 떨려고? 우리집은 두시 반까지도 버스가 다니는 이상한데라 상관 없는데, 너넨 지금 안 일어나면 빼박이잖어. 그리고 아저씨같은 밥술집에서 아저씨들이랑 떠드는 게 뭐가 재밌다고 자꾸 엉겨붙어들. 가라 좀.
- 음식도 맛있고, 선배들 어려운 얘기 하는거 듣는게 재밌어서요.
- 응 내일 더 어려운 얘기 해줄게. 가자 좀.
그렇게 실갱이를 하면서 열한시 좀 넘어까지 여자애들을 다 보내고 나면, 남은 머스마들은 항상 상황극이나 역할극을 기대했다. 나도 그 나름대로 재미도 좀 있어서. 흔쾌히 응해줬다. 이른바, 마초놀이.
- 테이블 붙여, 기수빨대로 앉어.
- 이 형 또 미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상한 색깔 들어간 술 밖으로 다 치우고, 형님 여기 소주 네 개요.
- ㄹㅇ 지킬/하이드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놓고는 여자들 없을 때 남자들끼리만 할 수 있는 얘기랍시고, 다들 신나서 무슨 야썰이나 야동얘기를 꺼내려다 말다 뭐 그런다. 귀엽고 순진하게도 발칙하고 화끈하게 연애하고 노는 친구가 별로 없던 관계로, 떡밥은 금방 식었다. 그러고는 소심한 머스마들 열명 남짓의 짝사랑, 연애 얘기를 들어주다가, 꿀밤을 한대 먹이고 술도 같이 먹이고, 그냥 그게 다였다. 그러다 소주를 각각 세 병 좀 넘게 마시다 보면, 테이블을 초록색 소주병으로 거의 둘러싸다시피 했다. 마초놀이의 연장으로, 그렇게까지 돈이 없는 게 아닌데도 일부러 안주를 아껴먹고 놀았다. 국물만 퍼먹고, 계란말이 시켜서 세로로 반띵한다음 한 겹씩 뜯어서 한 잔에 한 조각(...). 그쯤 되면, 머리를 길게 묶은 사장 형님이 와서 항상 김치찌개 육수를 더 부어주고 라면 대여섯개를 던져줬다. 멘트는 항상 똑같이. '학쉥들 빈 속에 술 먹으면 속 버려.' 가끔 사장과 직원들의 늦은 밥시간이랑 겹치면 반찬도 좀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