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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초승달

Neon Fossel 2021. 5. 15. 03:41

달은 제멋대로 차고 기울었다. 시간이 간다는 건데, 뭐 그리 좋다고 신나게 달 모양은 그리도 쉽게 휙휙 바뀌며 시간이 가버리는 건지.

초승달은 달이 빛을 담기 시작하는 때이다. 약간은 아래로 더 기울어진 초승달이었다. 그리고 월식이라도 일어난듯, 새빨갛고 얇디얇은 초승달이었다. 기이했다. 지구의 그림자가 드리워서 달을 가리면 월식, 태양을 가리면 일식. ‘식’. Eclipse; 빛을 잃다. 하필 저렇게 번역되어 있을건 뭐람.

와우에서 내가 플레이하는 조드는 특이한 강화 시스템으로 딜을 한다. 일식 - 태양이 가려지는 건데, 태양 관련 기술들이 강해진다. 월식 - 달이 가려지는데, 달 관련 기술들이 강해진다. 첫 패치때 그냥 ‘태양 강화, 달 강화’라고 머리에 후딱 집어넣고는 몇달째 신나고 처절하게 뿅뿅거리기만 했는데. 오늘 새삼 강화 버프의 이름을 생각해보고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식’. 가려진다는데  왜 그게 더 강화된다는 걸까. 생각을 해봤다. 아 설마 이건가. 달이나 태양은 원래 주변부에서 플레어(태양)나 코로나(달, 요즘의 흉측한 바이러스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는 달 주변의 빛무리를 이르는 이름이었다)가 빛난다. 다만 가리워지지 않았을 때는, 그 중심부 천체가 반사하는 빛이 더 강하니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다 일식이나 월식으로 본체가 가리워지면, 놀랍게도 그 주변부에는 일렁일렁거리는 강렬한 빛무리가 있다. 가리워졌을때, 오히려, 비로소 더 강하게, 원래 있었던 그 존재의 무게가 더 실감난다는 건가. 에이 그럴리가. 이정도까지 두번 세번 꼬아서 센치할만큼 와우 개발자들이 불필요하게 갬성적이거나 한가하진 않을테지.

최근 언젠가 술을 마시다가, 수도권 주민이라는 명예와 긍지(?)에 어울리게도 칼같이 열 시에 쫓겨났다. 벤치에서 노래를 틀고 맥주를 좀 더 마시며 사람구경을 하는데, 그날은 흐리지도 않은 주제에 달이 보이지 않았다. 작정하고 좀 마신 날이라서 취하기도 했었지만, 그냥 일부러 더 취한듯 웅얼거렸다.

ㅡㅡㅡ

이놈의 달은...
어디 가서 뒤져버린건지, 꺼져버린건지...
...왜... 안 보이고... 지랄이야.

뭐라고?

아니야 그냥 술 마셔.

ㅡㅡㅡ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건지
내가 나한테 하는 소리인건지
알수도 없고 알기도 싫은 웅얼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