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보단 몇 초 더 길게, 아이폰의 라이브포토 비슷하게 몇 초짜리 순간으로 박제되어 계속 기억된 순간이 있다. 어떤 힘을 갖기 시작했을 때, 이상하게 혹은 비슷하게 공통적으로 받았던 교육. 컨트롤. 힘을 쓰는 와중에도 이성을 완전히 잃지 않을 것, 그리고 필요한 순간엔 원버튼 스위치처럼 한번에 완전히 끌 수 있을 것.
태권도장에서 어린 나이에 비해 빠르게 유단자가 되고, 그러다 3단이 넘어서 고단이 되고, 좀 살벌한 시범용 무술과 시합용 겨루기를 배울 때였다. 겨루기는 흰딱 노딱 파란띠일때도 숱하게 하던건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서로 진짜 뭐 하나 부러질정도로 패지 않으면 계속 혼났다. 이유는 그랬다. 그렇게 펑 펑 소리가 나야 득점이 인정된다고. 그래서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으로 서로 조금씩 세게 몇 번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맞고나서 2초가 지났는데도 계속 아픔이 가시지 않는 데미지가 들어오면 갑자기 ‘그런 순간’이 온다. 여러 동의어 내지는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 삔또가 상한다 = 야마가 돈다 = 이성의 줄이 끊긴다 등등. 그때부턴 득점을 위한 스포츠가 아니라 눈앞의 저걸 후두려 패기 위한 야성으로 바뀐다. 그렇게 쇄도 아닌 쇄도와, 끔찍한 통증으로부터의 도망 아닌 도망(티 안나게 뒷걸음질치고 스텝이라고 뻥친다)이 계속된다.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가 되면 이미 아드레날린 때문에 아픈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팔다리 어딘가가 하나씩 기어가 나가서 작동이 안될 뿐이다. 그쯤 되면 이미 눈 돌아간지 오래다.
괘씸하고 분했다. 그래봐야 어차피 시합 나가서 이기자고 하는 스포츠인데, 이렇게까지 씨게 들어올 일이었나. 그리고 어차피 나보다 다 형이면서 굳이 동생을 이따위로 너덜너덜할때까지 패야 했나. 맞을때마다 뼈랑 내장이 딩딩 울리는 것 같단 말이지. 넌 죽었다 진짜 오늘. 형이고 뭐고 없음. 일찍 태어난 게 벼슬이냐. 이쯤 내면의 파이팅을 다지고(?) 짐승모냥 들이대려는 순간, 여태까지 더 치받으라고 거의 악을 쓰고 때려가며 부추기던 심판이자 사범이 뜯어말린다. 당연히 말을 들을 리 없다. 가운데서 가로막고 찢은 심판을 뚫고 엉겨붙어서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끝장을 보려고 했다. 그러다 어찌어찌 보조교사같은 견습사범들한테 뜯어말려지고 말았다. 그 뒤는 더 끔찍했다. 겨루기 내내 주고받은 합의 수보다 더, 그리고 그보다 더 세게 한시간을 내리 얻어맞았다. ‘네가 짐승이냐’라는 말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짐승처럼 행동했으니 짐승처럼 패야 말을 듣겠거니’라는 레파토리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삔또가 얼마나 상했고, 연습경기가 얼마나 치열했든, 심판 손이랑 몸이 사선에 보이는 순간 무조건 멈췄다. 딱히 생각을 하고 멈췄다기보다는 거의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공포. 저건 안 돼. 나중에서야 관장이랑 사범이 감성을 팔면서 해준 얘기는 이랬다. 멈추랄 때 멈추지 못하면, 길거리 쌈질이랑 다를 게 없다고. 지금이야 몇대 얻어맞은게 겁나서 멈추겠지만, 저걸로 학교도 가고 돈도 버는데, 한 번 심판 무시하고 내질렀다가 그 몇년치 고생이 한방에 날아간다고. 그래서 그렇게 가르쳤단다. ‘난 체고나 체대도 안 갈건데’라고 하려다가 그냥 귀찮아서 넘겼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리고 그 응용과 해설버전을 태권도를 관두기 전에 들었다. 나이가 몇 살이 됐든, 이미 너처럼 몸도 크고 힘도 센데 무술까지 배운애들은, 사실상 어른이랑 다를 게 없다고. 남자가 그 어른의 나이에 다다르면,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냥 장난치거나 실수로라도 툭 쳤다가 사람 죽을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절대로, 힘세고 무술까지 배웠으면 절대 사람을 치지 말라고. 이젠 잘못 치면 사람 죽는 나이다.
태권도 했던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많지도, 자세하지도 않았다. 근데 세월이 지나도, 그 순간 이후로 저 메세지는 항상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잘못 치면 사람 보낸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남은 학창시절동안, 반장질 하면서 애들을 뜯어말린적은 있어도 먼저 싸운 적은 없었다. 끽해봐야 말이 안 통하는 애들을 제압했을 뿐 치진 않았다.
그러다 군대에서 비슷한 풍경이 또한번 연출됐다. 해병대라고 모두가 다 몸짱에 운동선수같은 애들만 오는 건 아니다. 뚱뚱이도 있고 난쟁이들도 있고 쪼다랑 쫄보도 있다. 다.만. 그런 애들의 비율이 타군에 비해서 현저히 낮다. 그 말은, 다수가 운동이나 쌈질좀 해봤다는 애들이 온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훈련소의 일정이 무르익을 무렵, 육탄전 훈련을 시킨다면서 옥수수(2080 치아 +_+)만 간신히 보존시켜줄 것같은 앙상한 헤드기어를 씌운다. 그리고 끝이 날카롭지만 않은 창 길이의 봉을 주면서 80명짜리 집단 아홉 개가 개싸움을 시작한다. 이미 그 전의 훈련들에서 경험하기로, 교관은 무섭고 훈련은 더 무섭고 벌은 더 무섭다. 근데 이 해병대라는 집단은 단순하다. 약한놈은 죽어라, 못하는 놈은 죽여라. 그래서 일단 사람꼴로 살려면, 그리고 교관과 나머지 훈련과 벌을 피하려면 무조건 이겨야 된다. 상세한 묘사는 생략하더라도, 정말, 개싸움이었다. 육탄전의 정의가 애초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지옥처럼 싸우는 개싸움.
근데 그러다가도 교관이 멈추라고 하면 칼같이 멈춘다. 아예 자세가 정해져있다. ‘무릎 앉아’. 한쪽 무릎은 세우고, 한쪽 무릎은 바닥에 댄 채로 잘 훈련된 군견(개)처럼 온순하고 꼿꼿하게 앉아야한다. 그러고도 아직 치고 받은 분이 안 풀려서 씩씩대긴 하지만. 그러다가 교관이 와서 그 자세로 있는 훈련병의 목을 감싸쥐고 지긋이 내려본다. 정말 높이차이나 구도가, 훈련시키는 개를 진정시키거나 칭찬하는(?) 그런 구도다. 그럼 갑자기 몸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오히려 식은땀에 등을 타고 주룩 흐른다. 얘넨 사람 아니거든. 교관은. 멈춰야 한다. 이미 멈춰있다. 그게 우리의 브레이크였다. 안 그래도 등빨 좋고 무슨 운동 비슷한 것 하나씩 이상은 하다 온 놈들을 800명이 넘게 모아놓고, 심지어 그 800명을 다 눈돌아가게 만들어 놓은 아비규환이다. 하지만 그걸 통제하는데에는 채 2초가 걸리지 않는다.
해병대나 다른 특수부대는 말그대로 전투력이 강하다. 그 힘이, 그 칼이 잘못 향하면 여럿 다치는 거다. 그래서 그렇게 통제에 더 엄격하다. 힘을 잔뜩 줬더니 엄한데서 날뛰고 있으면 사고니까. 훈련소 마지막 주에는 드디어 약간 인간 코스프레와 대접을 받으며, 마치 대학 강의 듣듯이 이런저런 강의를 듣는다. 잠자지 말라고 엄청 잔소리를 듣지만, 대부분은 다 자버린다. 그러고 쪽지시험 답은 나한테 물어봤지. 난 지금이나 그때나 의미충이라서, 그냥 밖에서는 어차피 못 듣는 얘기니까 뭘 가르치나 하고 쭉 들어봤다. 역대 전적, 역대 지휘관들의 격언 등등. 그러다 눈에 들어온 한 구절이 있었다.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한 말이었다.
‘민에게는 양이 되고, 적에게는 사자가 되자’
아직 실무를 겪진 않았지만, 해병대에 대한 동경 못지않게 나쁜 이미지가 뭔지도 알고 있었다. 괜히 휴가나가서는 지나가던 시민들한테 센척하다가 시비붙고, 다른 군대들 얕잡아보면서 괴롭히고 모자뺏고 삥뜯고(…). 그런걸 명예로운 훈장처럼 여기는 이상한 문화가 일부 있다고 알고 있었다. 다른건 몰라도 그런게 참 싫었는데, 오히려 초대 사령관의 메세지는 저거였다. ‘민에게는 양이 되고, 적에게는 사자가 되자’. 역시 초반부터 썩은 조직은 흔치 않다. 다만 그게 기수가 1천 기가 넘게 지나오면서 점점 흐려지고 뒤틀렸겠지. 참 투박하고 별것 없는 말인데 정신이 똑바로 박힌 멋진말이라고 생각했다. ‘민에게는 양이 되고, 적에게는 사자가 되자’. 힘을 알맞은 곳에 알맞게 쓰는 것.
요즘 F1 레이스를 되게 열정적으로 재밌게 보고 있다. 거기서도 얼핏 비슷한 개념이나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흔히 ‘차가 빠르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악셀을 밟음과 동시에 뿜어져나오는 엔진의 출력과 굉음을 연상한다. 그런데, 살짝만 관심을 가지고 덕질하다가 알게된 맥락은 전혀 달랐다.
차가 ‘빠르려면’ ‘멈출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한다.
뭐 그렇다고 이게 드라이버의 마인드컨트롤이나 명상(…)만으로 차가 빨라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연히 기술적인 부분이 먼저, 그리고 상당부분 중요하다. 직선에서 밟는 건 성적이 좋지 않은 하위팀의 레이스카도 다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러다가 언젠가 마주칠 코너에서, 갑자기 360km로 달리던 차가 140km언저리까지 속도가 정확하게 줄어들지, 그래서 코너에서 튕겨나가지 않고 버티며 돌아나갈 수 있을지. 그만큼의 기술적인 스펙이 우선 받쳐줘야하고(브레이크, 다운포스, 서스펜션 등), 만약 그렇다면 그 이후엔 드라이버가 그걸 믿고 밟아주는 신뢰와 담력이 필요하다.
차가 제때 서줄거라 생각해야, 오히려 직선구간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풀악셀을 밟아서 차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브레이크도 확실하게 밟아야, 온도가 900도 넘게 올라가더라도 오히려 제 성능을 발휘하면서 차가 제대로 서게 된다. 반대의 경우로, 만약 드라이버가 차의 성능을 믿지 못해서 차가 못 설거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역순으로 따져보면 코너에선 이러다 차가 아예 스핀하거나 벽에 시원하게 들이받을것 같이 불안하니 브레이크를 훨씬 일찍 밟는다. 훨씬 느려지고, 문제는 그렇게 야들야들하고 서늘한 브레이크 온도에서는 그마저도 불안해서 일찍 멈춘 그것때문에 브레이크가 잘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애초에 이 코너에 진입하기 전부터도, 끝에서 안 멈출 것 같으니까 불안해서 악셀도 제대로 못 밟는다. 직선인데 기어가는 차가 탄생하는 거다.
역설인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 것 같기도 한 이치다. 살면서 여러가지 이유와, 조금은 다른듯 같은듯 비슷한 맥락으로 덧입혀진 어떤 명제.
힘을 가지기 위한 선결조건은,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