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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ng Frame_07

Neon Fossel 2021. 8. 10. 06:40

아직도 하키 룰은 잘 모른다. 꽤나 빈번하게 1분짜리 퇴장을 시키고, 점수가 크게 나봐야 10점대 초반, 혹은 축구의 그 2-5점 사이 어디쯤인 점수와 비슷하다는 것쯤. 하키 프로팀은 미국이 거의 유일하면서 제일 강하고, 그 대부분의 선수들은 캐나다 국적이다. 그래서 프로팀 대전을 하면 미국팀이 캐나다 팀들을 압살하지만 국대 경기를 하면 국경만 쏘옥 다시 넘어와서 캐나다 팀으로 심각할 정도의 격차로 이겨버린다. 뭐 이정도.

사실 하키 경기는 핑계이고, 그걸 빌미삼아 또 왁자지껄 떠드는 곳이다. 그날은 토론토 대학에서 대부분의 전공이 시험 끝나는 날이었나보다. 테라스, 루프탑 할것없이 움찔 움직이기만 해도 다 U of T 어쩌구 하는 옷을 입거나 물건을 들고 있는 애들이 발에 채였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다른 모임 근처를 지나가면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들이랑도 그냥 시덥잖게 인사를 하면서 너는 누구네 나는 누구네 하면서 떠든다. 그게 노는 방식인가보다. 수십 수백번을 가도 익숙해지지 않고 참 심심한 방식이다. 스팀휘슬이라는 지역 특산 맥주가 전통도 깊고 사실 맛도 좀 있다. 신토불이는 이동네가 더 심하다. 그거 두 병쯤 시키다가 나중엔 보드카 콕을 시켜서 들고다녔다. 중간에 길을 잃어서 3층에 갔다가 레이저 쇼를 하고 있길래 여긴 좀 우주로 가나보다 싶어서 다시 올라왔다.

힘들게 힘들게 친구들을 다시 찾아왔다. 너무 쓸데없는 얘기였거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어서 뭔 얘기를 했는지는 그당시에도 몰랐고 지금도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또 사람을 구경했다. 이 커다란 건물에 4층씩이나 되는데도 사람은 왜이리도 넘실넘실 치이게도 많이 들어와있는건지. 이게 서있는건지 그냥 둥둥 떠다니는건지. 그나마 앉아라도 있는 우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건가. 토론토 메이플 리브스(나와 인형이는 조선식으로 섞어서 ‘단풍맆스’라고 불렀다)는 역시나 또 졌다. 그나마 경기가 끝나니까 냅다 시부렁거리더니 한층 조용해졌다.

어학원 선생중에 어떤 아저씨는 좀 변태같이 생기지 않았냐, 너넨 왜 다 폰을 똑같이 그런거만 쓰냐, 그런 옷은 어디서 사는 거냐, 여름에 본국에 다녀올거냐, 에라 모르겠다 사진이나 찍자 치-즈 등등. 걔네는 그냥 그런 풍경, 그런 여유, 그런 분위기, 그런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쉬는 것이자 스트레스가 풀리거나 편한 것 같았다. 뭐 나쁘지 않았다. 굳이 모든 순간이 다 의미가 있거나 조용하거나 그래야 하는 건가.

그러다 저쪽 2인용 테이블에서 익숙한 뒷태(뒷태를 이런식의 뒷태로 보고싶진 않았으나)를 봤다. 은진누나. 나보다 한 살 많은데 하얗고 쪼끄만해서 훨씬 어리게 애처럼 보인다. 영어 이름은 Yui였는데, 내가 그 퍼스트 네임을 가진 일본 야동 배우가 정말 많다고 알려주니까 먹던 피자로 내 뒤통수를 후려쳤었다. 근데 지금은 저게 자세가 어우… 브루노랑 찐하게 키스중이다. 무려 마주보고 올라타서. 저럴거면 방을 잡지 그냥. 나중에 지나가다가 내가 어떻게든 봤을수밖에 없는 타이밍에 봤다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취한척하면서 말을 건다. “어! 패트릭!!!! 나 여기선 한국말 해도 되지롱 -“ “그래라 ㅋㅋ 언제 왔어?” “아ㅏㅏㅏㅏ까ㅏㅏㅏㅏ” “근데, 욕구불만이 그렇게 심했던거야? 요즘 좀 굶었어?”

그러자 이 누나는 데꿀멍이 되었다. 그러더니 술취한척하기를 포기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나한테 질문을 정말 어렵게도 한다고 했다. 이걸 안 궁하다고 해…(요즘 할만큼 건강하게 하셨다는 소리) 아니면 궁하다고 해…(뭐그렇게 한건 아닌데 궁하다니까 또 찌질해보이잖아) ㅋㅋㅋㅋ “그럼 대답을 안 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바본가 ㅋㅋ” 이러고 그냥 지나쳤다.

이번엔 럼콕을 마셔보자. 어차피 럼이랑 콜라가 여기라고 뭐그렇게 다르겠냐만은. 바텐더한테 주문하고 조금 지나서 술이 나왔다. 가지고 다시 자리로 가려고 또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진 파도(…)를 뚫으려는데 눈에 뭔가가 스쳤다. 검은 머리, 뺨, 목선, 스르르 사람들 사이로. 비슷하긴 한데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미 찾기에는 불가능할만큼 여기와 저 사이에는 좀비들이 한뭉텅이는 된다. 간신히 자리로 갔다. 그랬더니 이번엔 동양인들의 생김새 구분을 어떻게 하냐고 알려달란다. 도대체 한국인이랑 중국인이랑 일본인이 다른게 뭐냐고. 근데 이건 요즘 외국애들은 은근 잘 알던데. 그래서 대충 말해줬다. 옷 입는 스타일, 특히 헤어스타일은 엄청 차이난다. 늬들이 보기엔 다 눈이 옆으로 쭉 째진것처럼 보이지만, 이목구비에서 묘하게 풍기는 앵글이 조금씩 다르다 등등.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마르코가 갑자기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다른데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Chiemi!!!!”

응?
뭔소리야

근데

진-짜

왔다.

Chiemi가.

근데 또 Chiemi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저건 누구지.

내가 반가르마를 싫어한다고 몇번 얘기했었다. 난 여자고 남자고 대충 8:2쯤으로 갈라진 머리를 좋아한다. 그런 머리. 도대체 고데기로 몇시간을 펴서 말아내린건지 찰랑찰랑하는 생머리 8:2. 큰 체크무늬 셔츠인데 단추는 두개쯤 풀고 아래는 심지어 한쪽을 묶었(…)다. 짧은 청팬츠를 입고 검스(…). 게다가 뉴발이라니. 이상하게 얘는 처음 만났을때도 눈보다 다른데를 먼저 봤는데, 지금도 또 그랬다. 그러고 너무 놀라고나서야 얼굴을 봤는데, 화장이

마스카라도 하고, 섀도우도 조금 발랐는데

음…

화장을 되게 잘하는구나.

예뻤다.

사실 한국의 대학에서든 토론토의 이동네에서든, 시험기간이거나 끝나고 바로 알바하러 가야돼서 전투모드일때는 간신히 사람인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들 하고다니긴 하지만, 그냥 좀 시간 여유가 있거나 뒤에 약속이 있을땐 다들 어느정도 입고 바르고 다니는 정도이다. 저정도는. 근데, 

Chiemi가 저렇게 입고 바른건, 처음봤다.

되게 낯설다.

엄청 예쁘다.

왜 눈이 반짝반짝 하는거지. 눈에다간 또 무슨짓을 한 게냐. 막 또 렌즈까지 끼고 인공눈물도 뿌리고 막 그런 건가. 왜 눈동자가 반짝반짝 한거지.

“U….um…uh…. Ho…w….? Wh….a….t?” 으으으음…. 내가 이렇게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버벅거리자, 옆에 있던 애들이 웃었다. 니가 말을 못 하는건 처음 본다고. 너도 말을 못 할 때가 있었냐고. 아니 나는 근데 일단 이 생물이 뭐라고 말하는지 목소리를 들어봐야 내가 아는 그여자가 맞는지 믿을 것 같단 말이다. 근데 뇌가 꼬여서 뭐라고 물어봐야 될지 모르겠거든. 그러다가 다행히 낑낑거리고 감았던 태엽장치가 ‘탕!’하고 풀리듯, 일단 어떻게든 뇌가 풀려나가면서 속사포같이 질문이 튀어나왔다.

“여긴어떻게알고왔어,뭐타고왔어,어쩐일로온거야,옷은어쩌다가이렇게입었어,아니근데되게예쁘게잘하고왔다는말이야,근데진짜무슨일이야”

“하나씩 물어봐. 그리고 인사 먼저 해야해.”

Chiemi는 나보다 오히려 얘네들이랑 더 오래, 많은 수업을 들었었다. 근데도 역시나 예상가능하게도 얼굴만 알고 인사만 몇번 해봤지 잘은 몰랐다. 대화라고 해봐야 수업시간에 억지로 시키는 지문 몇마디 해본게 다일뿐. 이친구들도 역시나 Chiemi에 대해서 그정도밖에 몰랐다. 아, 하나 더. 패트릭이 요즘 끔찍이도 아껴서 꼭 붙어가지고 안 떨어지는 얼음공주라는 정도. 그렇게 Chiemi는 학원 밖에서 처음으로 얘네한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안녕, 난 Chiemi야. 패트릭이 매번 같이 가자고 했는데 못 왔었어.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나도 같이 껴도 될까?”

어… 이게 맨날 원하던것, 제발좀 했으면 좋겠는 행동을 막상 이렇게 확 와서 해버리니까 사람이 오히려 반대로 놀라게 된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For sure! why not!”을 외치면서 내 옆에다가 이미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얘네도 Chiemi가 항상 어느정도 궁금했나보다. 그렇겠지. 나같아도 그렇게 오래 볼 동안 안 친해진 애가 있으면 정말 존재론적으로 호기심이 들 것 같기도 해. 일본 어디에 사냐, 일단 일본사람인 건 맞냐, 토론토에선 어디쯤 사냐, 어디는 가봤냐, 네가 보기에 우리는 어떠냐 등등. 처음엔 (원래도 답답하게 입었을때도 예쁜 편이긴 하지만) 하도 예쁘게 하고 왔다고 남자녀석들이 우쭈쭈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나중엔 여자애들이 더 극성이다. 근데 아시아 사람들은 옷이 되게 핏하면서도 짱짱하고 예쁘다. 화장법도 우리랑 다른데 그건 어떻게 한거냐 등등.

Chiemi는 거기에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소중하게 대답해줬다. 가끔 말을 하다가 뭔가 느낌적인 느낌으로 말하고싶은 건 있는데 표현이 생각 안날땐 말이 느려지면서 내쪽을 쳐다봤다. 그럼 나는 그 문장의 중간이나 끝부분에 토익 빈칸채우기(갬성파괘무엇)하듯 단어나 표현을 넣어주었다.

It’s very different. it…..(depends)depends-
I was trying to….. do it anyway… (manage)manage it
I prepared for almost everything a…um… (just in case)just in case

스스로 말하게 해놓고 그냥 흐뭇하게 보고만 싶었다.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저렇게 내가 앞부분만 운을 떼주면, 직후에 동시에 발음하듯 말을 얹어서 따라와주고, 그 뒤엔 다시 하고싶은 얘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노는걸 예쁘게 지켜봤다. 그러다가 Juliana가 말했다. Guys, see, they are so adorable. 갑자기 그러길래 나랑 Chiemi는 뭔소린가 했다.

서로의 말을 이어서 완성해주는 게,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단골 소재인거 몰랐냐고. 상대 눈만 봐도, 입만 떼도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거, 그리고 그게 정말 맞아떨어진다는 거. 그게 참 로맨틱한거라고. 그리고는 약간 심술궂은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웃으며 얘기했다. 패트릭 넌 얘가 오고난 다음부터 눈이 가만있질 않아. 얘가 앉은채로 다리만 까딱 해도 다 쳐다보잖아. 드라마 응답하라의 격한 사투리 버전으로, 멜로눈깔.

Chiemi는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 그래도 그러는걸 보니 내가 알던 사람이 맞고 외계인이나 귀신은 아니구나. 그리고도 한참을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서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놀았다. 술은 무조건 내가 마시는 걸 같이 마시겠다고 했다. 숙취가 없고, 급하게 취하지 않는 것으로만 시켰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애들이 자꾸 건배하는 사이클이 빨라지길래, 같이 짠은 하되 천천히 마시자고 했다. 얘는 분명 술도 많이 안 마셔봤을거라.

그러다 Yuka한테 문자를 보냈다.
-I didn’t. She did. Any explanations?
멍청한짓은 내가 한 게 아니었네. Chiemi가 더 어마어마한걸 했다고. 어떻게된거야아…

근데 얘는 술도 잘 안 취하나보다. 뭐 다행은 다행이다 싶었고, 그래도 열두시가 되면 졸려할 시간이라서 열두시 반쯤 데려다주겠다고 하고 나왔다. 평소엔 어딜 가도 손 꼭 붙잡고, 내 팔을 기둥삼아 코알라처럼 붙는걸 좋아했다. 근데 오늘따라 자꾸 품으로 안겨들길래 반쯤은 안고 가다시피 나이트버스를 타러 갔다. 사실 정규노선은 끊길 시간이고, 나이트버스를 탈 정도로 밤을 찐하게 보낼 사람들은 아직 안 탈 시간이라서 의외로 붕 뜬 시간대였다. 중간에 퇴근하는 지하철 공무원이 한두명 탔다가 내린거 말고는 둘이서 타고 왔다. 영국같기도, 미국같기도 한 애매하고 칙칙하지만 예쁜 거리들을 풍경삼아 구경하면서 집으로 갔다. 반쯤은 내 가슴에 기대서 눕다시피 하고서도 또랑또랑하게 ‘저건 뭐야, 저긴 어디야’ 이러던 애가 어느 순간 조용하다. 그럼 그렇지. 니가 버텨야 얼마나 버티겠나. 눈을 스르르 감고 있다. 눈을 가볍게 감은 옆모습이 참 그림같다. 푹 깊게 자는줄알고 한참을 대놓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찰일기. 근데 갑자기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

-나, 예뻤어?
-그러엄

-나 이거… 이거… 엄청 어려웠는데
-이렇게까지 낯설게 노력 안해도 됐는데, 힘들었어?

-응. 근데 예쁘다고 하니까 좋아
-니가 제일 예쁘지. 그래도 힘들면 하지마. 가만히 있어도 예쁜데.

-싫어,
-그래라

-거의 다왔다. 내릴거야. 오늘은 어쩔수없이 문앞까지는 데려다주고 갈게. 매번 그냥 집앞 도로에서 갔는데, 너 너무 졸려하고 술마셔서 안될 것 같아.
-fwersf9348uisf…..

-응?
-오늘, 너 안 갔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