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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팩 푸슝_03

Neon Fossel 2021. 8. 27. 06:56

적당히 15분 전인 9시 45분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가기 전, 엘베 앞 복도에서부터 백신 접종자들은 따로 접수를 하고 밖에서 앉아 대기한다. 그동안 접수 순서에 따라 신분을 대조하고 문진표를 미리 작성했다. 처음 접수 목록에 비치된 펜으로 이름을 쓰는데, 별생각 없이 아무 펜이나 집어 들고 쓰다가 내 이름만 빨간색으로 써버렸다(…). ‘플래그인가?!’ㅋㅋㅋㅋ 심지어 문진표에 쓸 땐 또 이름만 파란색으로 쓰다가 뒤를 황급히 바꿨다. 오늘은 내 이름 폰트의 컬러가 대체로 수난을 겪는 날인가 보다.

이 신분대조와 문진표 작성 때, 앞에서 접수자가 물어본다. 주사 맞으면 접종부위 통증 때문에 그쪽 팔을 잘 못 쓸텐데(… 처음 듣는 건 아니지만 좀 섬뜩하다) 어느 쪽 팔에 맞을 거냐고. 내 앞의 순서 사람들은 대부분 오른손 잡이니까 왼쪽이라고 쉽게 말을 했다. 나한테도 물었다. ‘어느 쪽 맞으실래요?’

-어… 음… 잠시만요(?)
-…네?
-아, 양손잡이인데 각 손이 하는게 좀 달라서… 헷갈려서…
-아 ㅋㅋ 특이하시네요
‘주로 무게중심을 잡거나 힘을 실을 때 대부분의 기준 손은 왼손이다. 밥 먹는 건 양손, 글을 쓰거나 가위질, 칼질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 일할 땐 키워드나 단축키가 주로 왼손 타자, 게임할 땐 오른쪽 마우스가 더 넓게 많이 움직이고. 애매하네. 힘쓰는 건 왼손이고 정교한 건 오른손이란 얘긴데. 주사 맞은 부위에 힘이 가해지는 것과 정교하게 자주 움직이는 것 어떤 게 더 자극을 많이 줄까. 힘이겠지 아마. 힘을 주면 근육이 수축하면서 압이 올라가니까. 근데 또 정교하게 자주 움직이는 오른쪽에 맞으면 자극을 더 자주 준다는 거 아닌가. 세게 가끔 아플래, 약하게 자주 아플래. 아얽… 일단은 그럼 세게 가끔 아프고 그때 한 번씩만 참자.’ 남들한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나에겐 나름 되게 중요한 문제다. 머리카락을 잘리고 힘을 잃은 삼손처럼, ‘왼손을 끝장내다니 흑흑…’ 이렇게 느끼며(?) 말했다. 
-왼쪽이요 ㅠ
-네 ㅎ

참 별게 다 어렵다.

나중에 두세 가지 단계가 진행되면서 보니 인원은 5-6명씩 2-3개조. 전체 15명은 넘지 않는 것 같았다. 오 쾌적하네. 그리고 약간 보급형 싼 병원 느낌이 났던 이름과는 다르게 로비나 진료실도 되게 크고 고급지다. 내 돈 내고 받는 서비스가 아닌데 뽑기가 잘 됐네. 개이득.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섯 명 정도씩 끊어서 로비로 들어갔다. 거기서 잠깐 기다리면 한 명씩 진료실에 들어가서 문진표를 들고 짧은 상담을 진행하며 안내사항도 전달받는다. 다시 나와서 잠깐 기다리면 주사실에서 부르고, 드디어 찌른다.

일전에도 밝힌 바, 정작 심각하게 큰 통증은 아예 스위치를 꺼버려서 무딘 대신, 일상적인 소소한 고통에는 굉장히 예민하고 엄살이 심한 편이다. 전형적으로 덩치값 못하는 스타일(…). 간호사가 찌르기 직전에 맞는 백신이 화이자 1차라는 걸 알려주고, ‘따가워욤 -‘하고 살을 뭉쳐서 부여잡는다. 주사의 고통을 덜 느끼려고 반대편 검지 손가락을 엄지로 일부러 엄청 세게 꼬집었다. …? 근데 정작 주사는 거의 하나도 안 아팠다. 제길, 주의를 분산하려 꼬집은 애먼 반대 손가락만 겁나 아프네. 겁쟁이 녀석.

10시 접종인데 접수, 문진, 접종까지 다 마치니 10시 10분이었다. 빠르네. 원래는 뉴스 화면에 나왔던 임시검사 및 임시접종소 비슷한 분위기와 사이클을 상상했었다. 줄을 쭉 서서 한참 기다리다가, 막상 맞을 때는 되게 성의 없고 급하게 푸슉 다음, 푸슉 다음, 푸슉 다음. 근데 그거에 비해선 꽤나 괜찮은 고오급 레스토랑 서비스를 정갈하게 받은 느낌. 발생 가능한 증상과, 생활 주의사항 등등이 써있는 작은 쪽지를 간호사가 줬다. 15분 정도 병원에서 기다리며 관찰을 하다가 집에 가라고 쓰여 있었다. 딱 15분 채우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