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신경 쓰던 아재화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육체적/정신적 게으름; 그냥 스태미나가 떨어지는데, 몸이 무리를 하거나 데미지를 줄만한 행동은 오히려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쌓아온 영악함과 재력이 대부분의 육체적/정신적 수고로움을 커버하기 때문에 굳이 둘 모두를 움직일 필요가 없다. 적어도 익숙하게 같은 환경에 계속 머물러있다면.
스스로에 대한 방치; 스스로를 놔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늦었다고 포기하는 것.
세상과의 타협; 세월을 통해 대부분의 경우에 투쟁과 쟁취, 모험보다는 지능적인 타협이 단기와 중장기 모두에 유리한 선택이라는 것을 학습한다. 일종의 경제적이고도 필수적인 생존 방식이다.
방어적; 가진 것, 즉 지킬 것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질풍노도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떠들기만 하다가 목이 날아가면 나만 죽는 게 아니다. 내가 관계하는 사람, 그들로부터의 평판, 그리고 내가 쌓아놓은 물적/정신적인 기반이 날아간다.
육체적/정신적 고착화;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사고방식/행동/습관에 대한 전환 비용은 커진다. 그리고 기존 방식에 대한 ‘결과적 합리화’ 역시 누적되어 견고해진다. 이에 따른 효과.
이성에 대한 매력 어필이라는 ‘목적’의 상실; 위에 서술한 거의 모든 현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건 연애 중이든 기혼이든 미혼이든 어떤 경우에라도 발생한다. 단순히 유부남에게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가장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흔한 경우는 유부남이다. 굳이 젊은 시절의 싱글 때처럼 이성적인 매력을 어필하지 않아도 위의 여러 이유들이 ‘양해’되거나, 그것과 관계없이 일단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어불성설인 듯 보이지만 ‘배우자와 연애하고 있지 않는 결혼’이라면 이런 목적의 상실이라는 현상을 피할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도 서로와 연애해야 한다. 너와 내가. 조금 다른 경우로는 관계나 성 혹은 기타 경험을 지위와 재력으로 사버리는 경우 / 혹은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는 채로 포기해버리는 경우에도 목적은 똑같이 상실된다.
이런 것들을 주로 경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