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업, 그리고 언젠가는 업이었거나, 언젠가는 업이 되어도 그닥 나쁘지 않은 미래다 싶은 취미인 글과 음악. 그리고 다른 일상에서의 대화를 생각한다. 나는 그런 각각의 국면에서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혹은 지금까지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스스로가 업이든 취미든 굉장히 진리추구적이라고 생각한다. 분석, 추론, 입증, 완전무결, 안정성, 리스크에 대비하는 것에 굉장히 목을 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조금은 더 현상을 구제하는 인간이기를 지향한다.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주변이 의미 있어지기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기를. 오히려 내가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그걸 굉장히 지향하는 편.
주변의 평가는 사뭇 엇갈린다. 주로 업에서 나랑 깊어질 일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진리추구적이라고 느낀다. 어떤 천재지변 때문에 모든 게 날아가도 하던 일엔 그닥 지장이 없게 만들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듯. 아마도 일하는 사람들이랑 관계 때문에 더 그런 듯도 하다. 남들이랑 비슷하게 농담 따먹기도 하고, 가끔은 깊은 얘기도 하고, 뭘 먹거나 몰려다니거나 다 한다. 다만, 나는 일하는 사람들이랑 놀지 않는다. 적어도 친구로는.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나는 이미 상당히 현상 구제적인 사람이란다. 지금의 그 사람의 상황, 선택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인정해주려는 노력이나 섬세함이 있다던데. 지향하던 바를 이미 이루었다고 대뜸 반가워야 하지만, 사실은 뭔가 낯설다. 난 아직 많이 멀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적어도 내가 하거나 듣는 음악은 상당히 현상구제적이다. ‘어때야 한다’, ‘무엇이 맞다’라기보다는, 그래서 지금, 우리의 여기가 ‘어떻다’라고 설명하고 감싸안는 게 더 좋다. 음악으로는. 그래서 음악을 업으로 할 땐 나도 스스로 좀 지쳤었다. 음악이 밥벌이가 되는 순간, ‘음악이 어때야 한다’라는 곤조, 쪼, 야마 등등 여러 가지로 표현 가능한 어떤 것이 생기려고 하고, 실제로도 역할상 그런 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나는 충분히 진리추구적인 인간으로 태어났다. 적어도 속에서는 그렇다. 그러니 조금 더 현상을 구제하자. ‘어때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이렇구나, 그렇구나. 이렇게.
현상 구제, To save the phenomena.
100년 전의 토마스 쿤을 만났다. 지금부터 100년 뒤의 사람들은 누굴 만나 어떤 얘기를 듣게 될까. 인간에게 기록이 있는 건, 수명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게 하는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