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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lvl._01

Neon Fossel 2021. 10. 3. 02:01

학회 OB 노친 결혼식에 온 덜/더 노친네들 사이로, 이번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 등장한다. 대부분 기수의 운영진들은 이렇게 당사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선배 결혼식장에 의례상 오면, 얼굴을 아는 재학생이나 갓 졸업한 졸업생 선배들한테 일단 매미처럼 붙어서 용기를 충전한다. 그리고는 쭈뼛쭈뼛 회장-부회장-총무가 삼각편대를 짜서 졸업한 지 5년이 넘기 시작하는 노친네들한테 인사하러 오곤 했다. 굳이 안 해도 되는데 + 누가 해치는 것도 아닌데 매우 어색하고 잔뜩 긴장한 표정이다.

근데 오늘은 무려 한 명. 게다가 거의 호빗처럼 키가 작고 마른 여자애 ‘혼자’ 왔다. 그냥 ‘아담하네’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작은. 상대방은 우리를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봐야 하고, 우리 혹은 나는 내려다보는게 어색하고 미안할 정도로 각이 심해서 차라리 피차 어디 앉는 데를 찾아야 할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 애가 이 바글거리는 노친 뭉텅이에 당차게 찔러들어오더니 관등성명(?)을 밝힌다.

“안녕하세요 28대 운영진 총무, 19학번(ㅎ………무서운 숫자 ㄹㅇ;) 이은?윤?ㅅ르를랴ㅐㄷ쟈4ㄷ….입니다”

아, 총무.

뭐야, 회장 부회장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지?

그나저나 이번 회장 부회장은 누구더라. 우리가 모르는 게 저 운영진들 책임은 아니다. 이미 일 년에 몇 번이고 학술행사에 오실 거냐는 참석자 파악 및 홍보 문자에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수도 없이 봤을 거다. 다만 졸업생 각자가 들여다봐주지 못하는 바쁜 시즌에는 미안하다, 고생한다 정도의 인사말을 써줄 뿐 딱히 누군지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니까.

얘가 발음이 뭉개진 게 아니라 옆의 노친들 오디오가 동시에 하도 겹겹이 물려서 이름이 안 들린다. 예능 도시어부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아저씨들처럼. 다들 이름 듣기도 전에 “아아~ 새로운 총무님이신가요! 어서 와요!(악수)”를 시전한다. 어차피 이름을 들어 봐야 대부분 기억할 이유도, 필요도 없이 잊힐 가능성이 다분하니까. 이쪽 노친들 쪽에서 도움을 줄 여유가 생기면 그건 그때 당시의 접선책 몇 명의 이름은 알게 될 거고, 저쪽 재학생들이 필요에 의해서 문을 두드리면 그렇게 구체적인 용건이 있는 애들 이름은 나중에 알게될 거다. 그게 아닐 거면 인사치레에서 굳이 기억력을 쓰지 않는 어른의 효율성.

그리고 본인들한테 필요 없는 정보이니 상대에게도 주지 않는다. 인사만 받고 애는 멀뚱멀뚱 세워놓은 채로 지들끼리 떠들려고 한다. 아니, 후배가 어렵게 용기 내서 기수 학번 이름 깠으면 우리도 통성명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내가 몇 학번 위의 선배들과 그보다 훨씬 많은 동기와 노친네 후배들에게 핀잔을 줬다. 그제서야 “아참”이라면서 줄줄이사탕으로 학번이랑 이름을 읊는다. 왜 꼭 일부러 말하지 않으면 당연한 걸 하지 않는가. 귀여운 꼰대들 같으니라고. 쉬는 날 누군지도 모르는 선배 결혼식에 애들이 오는데, 왔으면 최소한 나중에 업계별 조언 구할 선배들이랑 안면 트는 정도의 베네핏이라도 얻어가야 박살난 주말에 대한 보상이라도 될 테니까. 그러라고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선배들을 다 인사시키고(‘너는 좀 차라리 니가 형을 해라 그냥’이라는 소리를 매번 듣는다) 동기와 후배까지 인사시킨 다음 내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08학번 한재윤입니다.”
“안녕하세요!”

근데 여태까지 다른 사람과의 인사에는 없던 어떤 말이 붙었다(?).

“08학번이셨구나… 제가 ‘초등학교’ 들어간 게 06년도였어요. 헿”

그럼 내가 대학 입학했을 때, 얘는 초3 = 10렙따리 튜토리얼 막 끝난 캐릭이었단 말인가. 홀리… 아니 근데 왜 하필 나한테만 그걸 왜. 내가 제일 늙어 보여서 그런가. 기분이 나쁘진 않고 그냥 묘하게 벙찐다. 대학생과 초3, 아저씨와 열 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대학생인 어떤 호빗이라는 지금의 풍경이 교차하면서 새삼 나이가 많이 먹었다는 걸 느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간 게 06년도였어요. 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