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종말 시리즈가 된 것 같은 일상. 사실 이 루틴은 인상 팍 구기고 싸울만한 일로 인해 생겼다. 출력장치 뺏기기. 공개적 엿듣기. 방송도 아니고 감찰도 아닌 이상한 그런 것.
회사에선 자꾸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라고 라운지를 만들어 놨으면서 정작 그러는 사람이 굉장히 없는 게 내 입장에선 더 이상하지만.
내 자리에 와본 사람들은 역시나 이전의 몇몇 일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하다고 한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나마도 겉옷이 없는 시즌엔 옷 마저도 없고, 내 맥을 가져왔던 그대로 뽑아서 들고 퇴근해버리면 디스플레이 하나만 있거나 그마저도 없을 때도 있다. 일할때 몸과 기기가 중력 때문에 바닥에 붙어버리지 않게 받쳐주기, 방해받지 않기. 책상의 용도는 그걸로 끝이다. 라고 말했을 때, 같이 밥을 먹던 네 명의 표정은 정말 사진으로 찍어서 간직하고 싶었다. 정말로 짬뽕밥을 떠서 입으로 넣으려다가 말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 생물은 뭐지, 너 뭐지 라는 표정.
자꾸 이상하다고 하길래 다른 사람들 자리엔 뭐가 있는지 모델하우스처럼 구경을 갔었다. 평소에 대충 지나오면서 못본 건 아닌데, 그렇다고 남의 자리를 유심히 보는 건 나나 당사자나 구린 기분이라 별로 좋을 일은 없을테니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그냥 뭐가 몇개쯤 더 있다는 건 안다. 눈이 멀어버린 건 아니니까.
테이크아웃 커피잔 두어개는 필수, 좋아하는 캐릭터나 사진들, 포스트잇, 펜, 노트, 책이 모든 면을 빼곡히 산처럼 채우고 있다. 이걸 그냥 무작위하고 무계획적으로 늘어놓았느냐 혹은 인위적으로 계획적으로 어떻게든 배치를 해놨느냐 그 차이정도 밖에는 없다. 그렇군. 내가 물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려면, 저런게 있으면 되는 건가’. ‘어, 매우.’ ‘그렇군.’
좋아하는 게 없나?
있지. 에프원, 건담, 와우, 책, 악기. 내 방에 예쁘게 전시해놓은 그것들. 근데 그게 내 의지랑 상관없이, 친해야할 필요가 있을지 없을지, 서로를 안다면 그 정도가 어디까지일지 아직 알지도 못하고 혹은 앞으로도 고민할 일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시되는 게 싫어. 내가 뭘 좋아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 어떤 생각을 한다(특히 메모)는게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아.무.것.도. 없어? 메모 안 해?
나 메모 되게 많이 하는데. 앱에다 해. 그럼 아무나 볼 걱정도 없고, 심지어 여러 데이터 포맷으로 입력이랑 출력도 되고, 게다가 잃어버릴 걱정도 전혀 없는걸. 포스트잇에 써놓으면 아무나 지나다니면서 ‘쟤 지금 저거 하는구나’ 다 알게 되고, 우연이든 고의든 메모가 없어지면 큰일나고. 그래서 붙이기 싫던데.
그럼 상비약이랑 치약칫솔같은건?
여기 있는데. 서랍에. 그걸 왜 굳이 유치원생처럼 꺼내놓고 쓰는거야…; 여기 무려 립밤이랑 핸드로션도 있음. 짱이징.
있네 진짜. 이 큰 서랍에 그거 딱 네 개;
그걸 꼭 채워야 되나.
그래 ㅎ;
그러더니 그날부터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데이빗이라고들 며칠 놀렸다. 솔직히 감성적으로 챙기는 몇몇 주변기기 악세서리들이라던가, 글쓰고 음악하는것도 그냥 그런 기능이 내장돼서 알고리즘대로 하는 거 아니냐고. ‘어 그렇다 왜 ㅋㅋ’ 라면서 그냥 맥주나 마셨다.
어느날도 다른때와 같이 노래를 들으면서 사실 손은 놀고 있었다. 머리에서 일단 처리가 돼야 손으로 뭘 할텐데, 정말 더럽게 어려운 문제였다. 이 답없는 솔루션을 통째로 들어내서 새 그릇에 담는데, 편의성과 보안 안정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은 뭘까. 한 여섯번째 방법까지 떠올렸다가 다 기각됐다. 이제 남은 방법은 프랑켄슈타인식 스까먹기와 우회와 눈가림밖에 없어서 절망하던 찰나… 듣던 노래가 갑자기 안 나온다. 아니 근데 좀 멀리서 작고 넓게 들린다. 뭐지?
사무실 스피커로 출력이 바뀌어버린 것. 홀리쓋.
어제 무결성 검사하는데 자기껀 고물이라 죽어간다고 게스트 계정으로 열어서 빌려달라길래 빌려줬는데, 그때 장치 설정을 물려놨나 보다. 누구의 소행인지 봤더니, 역시나 창가에 붙어있는 3번 녀석이다. 이럴때 일반적인 반응은 ‘어엇 쏘리쏘리 ^-^;’일텐데. ‘노래 좋드아ㅏㅏㅏㅏ!!’ 이런걸 혼자 듣고 있었어? 라면서 아예 커피를 내리더니 자리까지 잡는 저 태연함. 이쯤되면 나한테만 독특하다고 할 명분은 없는 거 같은데.
그 이후로 종종 심심하면 내가 뭘 듣고있는지 뺏어다 방송해버리는 게 일상이 됐다. ‘나 가끔 머리 잘 안 돌아가면 진짜 말도 안되게 복잡하고 빵빵한 노래 듣는데 어쩔거냐’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한다. 깜빡하면 반나절쯤 그냥 둘 때도 있고, 대부분은 몇곡쯤 흘러나오게 두다가 다시 장치설정을 거둬들여서 뺏어버린다. 그럼 끄면 끈다고 또 ㅈㄹ이다. 이거 유료 서비스야. 무료로 누릴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음. 물론 누구나 좋아할만큼 그런 것도 아니고, 그만큼 대단할 것도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