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저 빅뱅이란 사건 자체는 무에서 유가 그냥 떡하니 생겨버린 건데. 여기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그냥 무작위의 '사건'이라는 한 가지,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누군가 or 무엇인가가 의도적으로 발생시킨(이른바 지적설계 혹은 신적 존재의 창조설) 것. 무작위의 사건이라는 측면은 그 자체로 이미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냥 갑자기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거니까. 그럼 논의 가능한 것은 후자이다. 저게 누군가에 '의한', '의도적인' 시작이었다면.
신이란 작자는 어떤 존재인가. 굳이 우리 같은 우주 개별 개체의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에 관여할까. 물론 인간이 발명하거나 상상해낸 신의 개념에 의하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게 신의 편재성(ubiquity, 편재; 널리 퍼져 있음)이자 전지전능-Almighty니까. 근데 그럴 수 '있다'고 해서, 굳이 그렇게 '할까?'. 어떤 지적 존재가 설계 혹은 창조했다면, 처음 잠깐이야 우리가 심즈 하듯 재밌게 관여하겠지만, 결국은 게임이나 장난감처럼 언젠간 갖고 놀다가 질리지 않을까. 빅뱅으로 ON 스위치만 켜놓고 관조하는 게 아닐까?
의식, 사랑이라는 것의 형태가 굳이 인간이 지각하거나 상상 가능한 범위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아까 예로 들었던 브라만교 - 힌두교가 발명한 '브라만'이라는 우주 전체의식 같은 거? 사실 우주는 원래 하나의 통일된 전체의식을 가진 거지. 근데 그게 우리 인간을 비롯한 여러 개체가 그냥 각각의 아이디로 여기저기서 따로 로그인하는 거야. 마치 우리가 OS에 로그인 할 때, 정작 현실 본체는 같은 한 사람이면서도 admin을 제외한 여러 계정을 생성해서 로그인하는 것처럼.
근데 정말 상상과 고민이 다분히 우주로 가면서도 초6때부터 해결이 안 되는 것만 잔뜩이네.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본질(한정된 쓸모)로써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실존(용도에 무관하게 존재해버리는 것)'한다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사실 그놈의 '실존'이라는 게, 위에서 검토한 여러 가능성들을 그나마 특정 이론에 대한 무리한 전제나 맹신을 제외하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으로만 펼쳐놓고 보면 '허무'밖에 남지 않아. 그래서 실존주의는 허무주의와 완전히 연이어 붙어있거나, 그 둘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기도.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의 선언이 곧잘 '허무주의'로 요약 혹은 귀결되는 거겠지.
사실 아까 우리의 대화가, 정확히는 너의 말이, 그런 '허무'로 빠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무조건 생을 이어가야 한다, 허무해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굉장히 기계적이고 역겹기도 하지만, 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름 바로 뒤에 마치 라스트네임처럼 붙여서 '허무주의'라고만 요약하는 니체의 그 생각, 그 책은 결국 '우버맨쉬; 초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국어로 '초인'이라고 번역되다보니 'Hero' 같은 상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지만, 그것과 다르다. 니체의 초인은 저런 '실존적 존재로서의 허무'를 견뎌내고, 정확히는 '극복'하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누가 나의 존재와 시작과 끝을 해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심지어 그게 아무런 이유나 목적이 '없다'해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이유와 목적이 있는 삶. 말만 듣기엔 흔하고 쉬워보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여러 가능성에 비춰보면 정말 황망하기 그지없도록 어려운 말이다. 누가 어떻게 시작해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며, 그나마 예측 가능한 끝은 '없음(무)'로의 귀결이다. 그 사이를 어떻게 살아버리든 누가 무슨 상관인가? 우버맨쉬;초인이 매순간, 매일 극복하는 허무는 대략 요약해도 이정도의 슈퍼허무와 슈퍼팩폭이다. 그 모든 걸 감내뿐만 아니라 극복하고 사는게 우버맨쉬다. 내가 걷는 길이, 내가 하는 행동이, 곧 내 존재와 생의 목적이자 도덕이며 필요가 된다. 이 명제는 참으로 무섭다. '너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니까.
'신은 죽었다'라며 신이든 뭐가됐든 세계나 존재를 설명하는 그간의 방식이나 '당위성'을 발로 걷어차는 것까지는 쉽다. 개나소나 '나씨나길'을 외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뒤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그 다음이 정말로 어려운 거다. 모든 걸 집어던지고 아무런 극단적인 쾌락(사람, 취미, 기타 기행)이나 눈먼 목적의식(aka 돈, 직업, 사상, 사이비)에 그 기간을 던지는 건 쉽다. 어차피 존재적 게으름을 그대로 방치하면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결말이다. 그런데, 다만 '당연한' 그 결과를 극복하고, 그 위태롭고도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건 정말로 '위대한' 싸움일수도 있다. 삶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무언가에 맹목적인 그 방향성을 꽂아놓기만 하고 안도하는 게 아닌, 매순간 내가 쌓고 만들어가는 것. 위대한 평범함.
애초에 요즘 사회에서 '평범'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겨워하는 우리지만, 나는 감히 우리가 이러길 원한다. 그것만이, 실존을 자각해서 허무에 이르렀음에도 허무에 머무르지만은 않고, 다시 실존으로 나아가는 삶이 아닐까.
되게 뜬금없지만 영화 <인턴(2015)>에 나온 70세 인턴인 로버트 드니로가 괜히 그런 인물에 가깝다고 느낀다.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노년의 퇴직자, 아내와 사별했고, 갑자기 생긴 여유시간과 무력감을 어찌할줄 모르는 노친네. 그는 불안했고, 무력했고,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최소한 '인정', 좀 더 노력하자면 '긍정'하고 나아가는 그 삶의 드라이브가 인상적이다. '그냥 기특하게도 열심히 사는 노친네'라고 축약할수도 있지만, 그게 저들의 누적된 피로감과 실망, 게으름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가늠이나 상상해본다면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어떤 놈들은 밤새 술먹다 자고 일어나서 카페에서 해장 커피 하면서 이런 얘기를 또 하루종일 하면, 그게 책도 되고 극이 되기도 하고 밥벌이도 되고 했을텐데. 괘씸하고 부러운 새키들. 논리철학의 잣같음은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평생을 가지고 놀았고, 니체와 보들리야르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 놀았다. 역시 블루오션이 블루오션으로 남는 시간은 짧다. 시간 됐다. 다른 애들 오겠다. 나가자.
그런데 이놈이랑 2008년쯤 시험기간 끝날 때마다 AVA온라인을 반기 행사처럼 했는데, 그 때 아이디가 couldneverbeme였다. '뭐하는 놈이야'라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