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놈의 만년필에 전봘 넣겠다고 푸닥거리 하는 건, 거의 김장처럼 연례행사 내지는 반기행사 쯤 되는 것 같다.
저번달쯤 (또) 꽤 오랜만에 만년필을 다시 살려냈다. 그런데 안 쓴지 하루가 삼일, 삼일이 일주일, 일주일이 이주일씩 되다보니 금방 마르거나 막힌다. 여태까지 그렇게 막힐때마다 유닛을 분리해서 온수에 넣고, 잉크 카트리지도 새것으로 계속 갈았었는데, 맙소사. 이번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항상 그정도의 극약처방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저 굳은줄 알고 내다버린 멀쩡한 카트리지가 몇 개란 말인가. (아마도 가까운)미래에 필요할 나를 위해 남겨둔다.
0. 애초에 뚜껑이 똑딱이가 아니라 돌려서 잠그는 방식의 만년필은 오랜만에 써도 거의 마르지 않는다. 엄한데 쓸 돈 한두 번을 아끼면 그런 급을 살 수 있다. 스스로가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의지와 애정의 방향은 결국 시간과 자원을 어디에 쓰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쓰고 5초 뒤에 후회할만한 데에 허투루 돈 쓰지 말고 이런데 써라. 미래의 너, 나놈.
1. 만년필 촉에 물 한두 방울만 떨어뜨리고, 잉크가 나온다 싶으면 촉에 남은 물기는 휴지로 닦기. 이번에도 이렇게 살렸고, 과거에 멀쩡한 카트리지를 내다버렸던 경우들도 거의 웬만해선 이걸로 다 해결되었을 거다. 정말 몇 개월, 몇 년씩 묵힌 게 아닌 이상 카트리지부터 유닛이 통째로 굳어버릴 일은 드물고, 대부분은 펜촉 부분에서 흐르던 잉크가 살짝 말라있는 상태이다. 만년필 잉크는 당연히 지용성일 것 같지만, '의외로 수용성'이다. 그래서 물 몇 방울이면 해결이 되는 것. 가끔 옛날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년필이 잘 나오라고 펜촉을 혀에 찍었다가 쓰는 장면이 나왔던 것도 같은데, 음... 더럽다. 그리고 결국은 펜촉도 쇠인데, 사람 침을 묻혀봐야 혹시 모를 오염과 부식을 앞당길 뿐이다. 물 몇 방울 쓰자 그냥.
2. [1.]의 방법이 먹히지 않으면 촉부터 유닛, 카트리지까지 싹다 굳거나 그냥 카트리지에 있는 잉크를 다 쓴 거다. 양쪽의 경우 모두 기존엔 매번 했던 것처럼(...) 뒤쪽의 속이 텅 빈 케이스만 제외하고 펜촉과 유닛을 온수에 담궈서 모든 잉크를 다 녹여서 빼낸다. 그리고 카트리지를 새것으로 바꾼다. 유닛 심연부터 꽉꽉 굳어있던 잉크가 스멀스멀 녹아서 공허의 촉수처럼 뜨신물에 풀어지는 걸 보면 은근히 이상하게 좋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그걸 멍때리고 보고 있으면 좀 변태같으니까, 담궈놓고 할 일 하자. 대충 풀어졌다 싶으면 시간부자일 땐 자연건조를 하고, 그럴수 없거나 그러기 싫으면 헤어드라이어로 말리자.
오래 썼다고 당연히 사용법이나 관리법을 잘 알거라 생각했고, 내가 알고있는 그게 이미 최선일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사각사각 재밌다. 그림을 그릴줄 모르는(정확하게는 어떻게든 그리긴 하더라도 퀄리티가 끔찍한) 나로서는 남들이 그림 그릴 때 느끼는 것을 넘겨짚으며 상상하는 행동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