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멜랑콜리아
최근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오늘날 사랑은 무한한 선택의 자유와 다양한 옵션, 최적화의 강요 속에서 파괴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끝없이 열려 있는 세계에서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고들 한다. 식어버린 정열에 대한 한탄도 들려온다. 에바 일루즈Eva Illouz는 <사랑은 왜 아픈가>라는 저서에서 오늘날 정열이 식어버린 이유를 사랑의 합리화 과정과 선택 기술의 확산에 돌린다.
자산가치(주로 부동산 가격)를 기준으로 시간의 가치가, 뒤집으면 시간의 기회비용이 무엇보다 큰 시기였다.
'가만히만 있어도 뒤로 간다'
빚을 내서라도 자산을 보유하지 않으면, 그 하루하루의 기회손실은 일당으로 환산한 임금소득보다 훨씬 더 컸다. 그래서 우리는 너도나도, 무려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설국열차의 꼬리칸이라도 비집고 들어가듯 그렇게 자산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했다. 우리는 그때 거기서 확실하게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잠시는 안도했다.
'더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다 타셨나요?"
"... 네?"
"열차 출발합니다."
그 롤러코스터는 희한하게도 우리가(정확히는 각자 내가) 타기 직전까지는 엄청난 오르막이었는데, 우리가(내가) 타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이었다. 90-2000년대 한국 도시괴담으로 나온 제주도의 착시 도로처럼. 초과공급, 금리인상(이건 부동산이랑 세트로 신나게 놀던 주식도 똑같이 당하는 요소다)라는 쎄한 단어가 몇 번 스치고 지나가더니 내리막은 멈출줄을 모르고 더욱 가파르게 변한다.
우리는 '영혼'을 박박 끌어모은 건데,
그럼 우리 '영혼'이 '루팡' 당하는 건가?
세대 전체로 봤을 때는 남일이 아니고, 굳이 나 개인의 입장을 따져보자면 시기상 간발의 차이로 직접 당사자가 아니긴 하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기껏 끌어모은 영혼이 루팡 당하고 마는 걸까.
길게는 2년부터 6개월 전까지, 짧아도 3개월 전부터 분명히 전조는 있었다. 본인의 대출 금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렇게 대출이라 쓰고 영혼이라 읽는 그것을 끌어모아서 산 자산의 가격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 개인은 몰라서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 우리는 합리적이었다. 그때와 그 상황 한정으로. 중장기적으로는 downside potential이 큰 걸 알면서도,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내몰렸을 뿐이다.
지역별로 부동산의 형태에 따라 파장이 미치는 시기와 규모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은 모두가 노출되어있다. (도대체 누가 구분하고 만든 말인지 모르겠으나) M+Z세대의 앞쪽 절반에서 1/3쯤의 내 나이대는 또다시 포스트 코로나 시국으로 접어드는 첫빠따 역할을 맡았다. 끌어모은 영혼은 그대로 모래주머니가 되어 우리의 출발선에 같이 놓였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해서 빌린 대출금액이 같이 줄어들진 않는다. 점점 깡통 비슷한 무엇이 되어가는 집을 위해 모래주머니(영혼이었던것)를 차고 처음부터(혹은 하던대로, 혹은 더 혹독하게) 상환의 삶을 시작하는 거다.
세대에 무슨 마라도 낀 건가. 첫빠따이자 유일하게 수능을 온리 등급제로 치르면서, 보내는 고등학교와 받는 대학교들이 양쪽에서 난장판이 벌어졌을 때도 도대체 하필 우리한테 왜 이러나 싶었는데.
참 재미있는 세상이야. 무사히 잘 살아냅시다. 빠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