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 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아토포스로서의 타자는 언어를 뒤흔든다. 그에 관하여, 그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수식어는 틀리고, 고통스러우며, 서투르고, 민망하다 [......]." 부단히 동일화시키는 오늘의 문화는 아토포스의 부정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바로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경험 자체가 사라져버린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달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저러다 반달 금방이고, 보름 금방이겠지. 그믐도. 달은 하루중에도 꽤 다이나믹하게 변한다. 떠서 지는 것도 은근 빠르고, 어느 각도에 있냐에 따라 크기도 다르고. 무엇보다 머리 위에 높게 떴을 때는 새하얗고 밝다가, 지평선 근처로 내려가면 노란빛이 진해지다가 거의 붉어지기도 한다.
나뭇가지가 종종 가리고, 가로등이 밝게 훼방을 놓는다. 잠시 앞에 다가가서 봤다. 나뭇가지는 치워냈어도 가로등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잘 보였다.
잠시 바람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다 얼굴을 살짝 돌리는데, 달빛이 달라졌다. 더 크고, 더 샛노랗고, 더 가깝다. 좀 더 가까이 가면 더더더 크게 보일 것 같아서 다가갔다. 그런데 정작 아까 달이 잘 보였던 그 자리까지 다가가보니 달이 오히려 더 멀고 작아보였다. 뭐지. 그나저나 달을 볼 때 나뭇가지랑 가로등이 이렇게 갑갑하게 방해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달이 너무 지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봐서 그렇구나. 내일은 가능하면 좀 더 일찍 볼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