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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위한 장기

Neon Fossel 2022. 6. 13. 23:00

저스틴은 클레어와 다툰 뒤에 다시 절망에 빠지고, 힘없이 책장 단 위에 진열된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의 추상화들에 차례차례 시선을 던진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발작적으로 펼쳐져 있는 책들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보란 듯이 인간 심연의 열정을 암시하는 그림들을 세워놓는다. 바로 이 순간 다시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이 울려 나온다. 그러니까 사랑과 갈망, 죽음의 주제가 다시 부각되는 것이다. 먼저 저스틴은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들>을 펼친다. 다음으로 다급하게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손에 쥔다. 다음 차례는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왕>, 브뤼헐의 <게으름뱅이의 천국>, 마지막으로 외롭게 우는 수사슴을 묘사한 칼 프레드리크 힐Carl Fredrik Hill의 스케치다.

 


미친놈이 귀찮고 더럽다고 미친짓을 계속 하게 놔두면, 자기가 옳아서 가만히 놔두는 줄 안다. 그리고 그게 먹히는 줄 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밟아놔야 한다. 아예 반격할 의지와 능력 자체를 상실할만큼. 답답함을 가장한 솔직한 내 생각은 이렇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 유럽의 여러 테러단체, 마지막으로 북한. 이런 존재들이 괘씸하고도 위험한 이유는 아직도 민간인의 일상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방식의 전쟁이 21세기인 지금 이 시점에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명화와 민주화가 진행된 지역 - 주로 서방과 그 동맹(한국 등) - 에서도 이해관계와 선동의 성공여부에 따라 위험한 순간의 직전까지는 도달한다. 그러나 그 국가들은 알고있다. 어차피 홧김에 내질러봐야 치러야 할 불필요하고 끔찍한 대가가 더 크며, 그지경까지 갈 경우엔 그냥 잃는게 큰 정도가 아니라 본인들을 포함한 모두가 공멸해버릴 수도 있다는 걸. 상호확증파괴.

그래서 함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측면에서 영국과 미국이라고 뭐그리 낫다거나 떠받들어야할 고결한 나라들은 아니다. 더하면 더했지 똑같은 놈들이다. 다만 서방 진영의 기수라는 그 두 나라가 다른 무뢰배들과 다른 이유는, 최소한 핑계와 명분이라도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척’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나라 대선에 관하여 쓸 때도 비슷하게 얘기했던 내용이다. 그들의 진심이 얼마나 뻔하게 탐욕스러운지, 혹은 진심만은 정말 고결한지, 그건 검증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문명과 상식 선에서 먹히는 변명이라도 하려는 ‘척’을 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문명과 민주주의가 강제하는 여러가지 브레이크가 걸리고, 그들이 그 브레이크를 신경쓰는 척이라도 하면서 타협하게 된다. 미국과 서방이 힘이 없어서 러시아를 못 치는 게 아니다. 서로 번갈아서 빨간 단추를 누르는 순간, 전쟁이고 뭐고 지구가 옆구리 터진 코코넛 열매처럼 박살날테니까. 그래서 안 하는 것뿐.

반면 러시아와 중국을 필두로 한 ‘그런 미친놈들’은 그런 의지와 성의가 없기에, 괘씸함을 넘어서 저걸 진짜로 하나 싶은 짓을 하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설치게 놔두면 안 된다.

그런데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미친놈들을 처단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광기에 휩싸이면, 그 결과는 9.11 테러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20년간 때려부은 돈과, 미군과 현지인 양쪽의 희생만큼 끔찍한 결과로 돌아온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억제력과 외교력, 그리고 전면전이 아닌 최소한의 특수작전이다. 실제 전쟁에서 쓰지도 않을 무기들을 갈아치우면서 계속 경쟁하는 게, 뻘짓처럼 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뻘짓인 면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서로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굳이 진짜로 부딪치지 않아도’ 알아서 숙일 곳이 숙이고 들어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외교력도 마찬가지이다. 군사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수단으로 누가 더 우위인지, 그걸 총이 아니라 제스처와 관계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장치로 어지간하면 우리가 물리적인 전쟁을 목격하거나 겪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 두 가지로도 해결이 안 되는 수준이라면, 전면전(뉴스에서 주로 Ground Operation이라고 하는)이 아닌 특작부대의 특수전 수준으로 빠르게 마무리되어야 한다. ‘굳이 전면전을 해보지 않아도, 우리는 필요한 타겟을 항상 추적중이며,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언제든 정밀타격 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발각될 경우 정치적 부담이 큰 대신 그 외 수많은 양측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을 동반하지 않아도 된다.

세련되지 못하게 불쑥불쑥 이미 여러번 드러났지만, 정말로 분하고 괘씸하다. 요즘같은 세상에도 저런 물리적인 무력시위와 전쟁범죄가 대낮에 눈뜨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저 발상이. 이런저런 헐리우드 영화까지도 웃기지도 않게 어거지로 들어가는 중국 배우와 중국 선전 및 광고들이 너무나도 싫다. 한때는 이런 상상도 해봤다.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하든, 그래도 미국이 어차피 제일 세니까(…), 혹은 나머지 서방 전체가 합친 힘이 더 세니까 러시아랑 중국이라도 아예 확실하게 군사적, 경제적으로 봉쇄해서 인간적인 수준의 대화를 할 때까지 쥐어짜면 어떨까. 다시 한 번, 이건 선빵이 어느쪽이었든 결국 또다른 광기일 뿐이다.

끔찍한 전쟁범죄에 노출된 우크라이나 국민과 군인들도, 더 나아가 러시아 군부와 지도부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러시아 국민들과 군인들도 더 이상 말이 안 되게 희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겪은지 아직 채 70년, 세 세대가 지나지 않은 일이다. 우리 다음 세대는 물리적인 전쟁이라는 게 두려워해야 할 것인지도 알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만큼, 그렇게 완전히 잊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직 저런 수단을 끄집어내는 소수의 사람과 집단들을 완전하게, 사전에 억제해야 한다. 이런 옵션은 애초에 테이블에 올릴수도 없게끔. 답은 들뜬 열기와 광기에 있는 게 아니라, 냉철한 머리로 상대가 어떤 장기말도 움직일 수 없게 하는데 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했을 때 너희가 미친짓을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은 확실히 없다 -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