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Michel Foucault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규율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더 이상 복종적 주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정말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 자기 자신을 착취하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 그는 무비판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최소 국가의 시스템”이자 “자유의 관리자”로서 시민적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자유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구호에 깔려 있는 폭력과 강제의 구조는 푸코의 시야를 완전히 벗어난다. 그리하여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를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로 해석한다. “나는 당신에게 자유의 가능성을 마련해주겠다. 나는 당신이 자유로울 자유가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는 실제로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 속에 빠뜨린다. 푸코가 말하는 “자아의 윤리”는 억압적 정치권력, 즉 타자 착취에 대항하기는 하지만 자기의 착취의 바탕에 놓여 있는 자유의 폭력에 대해서는 맹목적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8년째 되었다. 이렇게 쓰지 말 걸 그랬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아저씨가 됐구나. 근처에서 걷던 급식들에게서 흥미로운 몇 개 단어가 들렸다. ‘나도 가람중 갈 걸, 거기 가면 공부 안 해도 되잖아’. 내가 다녔던 학교와, 거기에 한 번도 호응된 적이 없었던 수식어가 너무도 자연스레 나란히 놓였다. 이게 평준화의 결과인가. 그러더니 몇 문장 사이 열여덟 인생에 벌써 몇회차가 넘어간 본인의 연애와 연애 대상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잠깐,
공부를 안(못)해서 이리저리 도망치는 너같은 애한테 매력을 느껴서 연애를 ‘해주는’ 여자애도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가 멋있고, 어디에 끌려서? 뭔가 저항적인 매력, 혹은 그냥 심심풀이인가.
’아, 만약 상대도 피장파장이라면’
그러고보니 내가 18년 전 열여섯일 때도 그런 게 없었던 건 아니니. 물론 그때도 뻔히 보면서 이해는 안 됐지만. 그래, 관심에서 벗어난 학교생활을 대충 버티는 것만 해도 고단하실텐데, 부디 댁내 연애놀이라도 재밌으시기를.
, 절망적이군.
, 확실히 중학교를 졸업한지 18년째 된 아저씨가 맞는 것 같다.
나나 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