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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으로 열정적인 독서에 관하여 - 페스트, 에로스의 종말

Neon Fossel 2022. 9. 19. 11:11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Subjekt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kt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빚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퇴근하는 길에 오랜만에 동네 카페에 들렀다. 집에 혼자인 날도 집은 어느새 종종 피해야 할 장소가 되기도 한다. 눈앞에 살림거리들이 보이면 아무래도 흐름이 뚝 뚝 끊기게 되고, 그러다 결국엔 그 살림에 지쳐서 그냥 널브러지는 게 대부분이라. 잠깐이라도 주의를 뺏기지 않고 생각을 이어가려면 아무도 없는 집이지만 살림으로부터 가끔은 도망칠 필요가 생겼다.

 

<페스트>를 거의 다 읽었고 <에로스의 종말>을 다 읽었다. 안 읽을땐 읽고 싶고 막상 펴서 읽으면 읽기 어려운 책들이었다. 일상적인 대화체나 평범한 문어체도 읽는 게 느린데 한국어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곱씹어야 직역과 의역 사이 어딘가에 간신히 도달하는 문장과 단어들이었다. 페스트를 쓴 알베르 카뮈는 문장을 멋지고 찰지게 잘 치는 사람이다. 에로스의 종말에서 한병철은 철학서답지 않은 끈적함과 열기를 한껏 발산했다. 그 말들이 그렇게 어렵게 들렸던 이유는 오히려 너무 철학과 논리로만 치부하고 ‘어렵게’ 넘겨짚으려 해서 그랬던 듯.

 

<에로스의 종말>은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에로스의 대상은 철저하고 온전하게 타자여야 하며, 그러한 타자의 ‘부정성’에서 에로스가 시작된다. 에로스가 상실된 관계와 삶에는 그저 길들이기-권태로 이어지는 전개, 피차가 상호에 의해 소외된 채 파편적으로 분절된 소모하기, 자발적이고 긍정적이기에 더욱 끝이 없는 상호 착취가 남을 뿐이다. 한편, 데이터와 논리구조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 의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연구되며 설득을 위해 발화될 때 그것들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학술적으로도 에로스의 역할은 여기에 있다.

 

<페스트>는 75년 전에 쓰인, 요즘 우리가 겪는 것에 대한 소설이다. 흡사 우리의 현재가 소설 집필의 시점에서는 ‘오래된 미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흥미로웠다. 설정상 2차 세계대전의 즈음에 알제리의 한 작은 항구도시에서 1년간 재유행한 페스트. 그 가상의 재앙 속에서 인간 군상과 인간의 실존을 다양한 시점에서 묘사한 카뮈의 표현을 수도 없이 밑줄 치고 북마크했다. 그중 몇몇은 이렇다.

 

어떤 도시를 아는 데 적합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집요하게 이어진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휴머니스트들이 제일 첫 번째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1만 명의 사망자라면 커다란 영화관을 가득 채운 관중의 다섯 배에 해당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하여,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머릿속에서의 상상,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문단이, 요즘 시기적으로는 작중 상황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이유로 내밀한 관계 혹은 군중속에서 고독해지는 내 스스로의 상황이 묘사된 것 같아 통쾌하고 후련했다.)

 

그러한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기에 제각기 혼자서 저마다의 근심에 잠겨 있었다. 만약 우리 가운데 누가 우연히 자기 내심을 털어놓거나 어떤 감정을 표현해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답은 무엇이건 간에 대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상대방과 자기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오래도록 되새기고 괴로워하던 끝에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그가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 이미지는 기대와 정열의 불 속에서 오래 익힌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은 ‘습관적인 감동이나 시장에 가면 살 수 있을 상투적인 괴로움이나 판에 박은 감상을’ 마음에 그리는 것이었다. ‘호의에서건 악의에서건 그 응답은 언제나 빗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침묵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경우, 남들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쓸 줄 모르게 된 이상 자기들도 차라리 시장에 굴러다니는 말로 쓰고, 그들 역시 상투적인 방식으로 단순한 이야기나 잡보, 이를테면 일간신문의 기사 비슷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도 가장 절실한 슬픔이 흔해빠진 대화의 상투적 표현으로 변해버리기 일쑤였다. 페스트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바로 그런 대가를 치르고서야 겨우 아파트 수위의 동정이나 옆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술자는 차라리 훌륭한 행동에 너무나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다 보면 결국에는 악의 힘에 대하여 간접적이며 강렬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갖는 것은 그 행위들이 아주 드문 것이고, 악의와 냉정함이야말로 인간 행위에 있어서 훨씬 더 빈번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것은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풍부한 지식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이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 무지한데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혼은 맹목적인 것이며, 최대한의 성찰이 없고서는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다.

 

카뮈의 글을 읽으면서 처음엔 어떤 단어나 구를 하이라이트하다가, 그게 문장과 문단으로 옮아가다가 이내 아예 페이지 전체를 북마크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경험을 꽤 여러번 했다. 오랜만이었다. 작중의 페스트와 대응되는 현재의 코로나를 제외하고서라도 요즘 이런저런 일상과 진로에서 느끼는 갑갑함과 불안함, 그리고 불편함을 나누기엔 일상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치는 사람이 넘치더라도 설명할 곳이 거의 없거나 드물었다. 그래서 종종 ‘시쳇말’로 바꾸어 열심히 시도해보다가 오히려 메아리만큼도 돌아오지 않는 울림에 좌절했다. 결국엔 그냥 그쪽 화제는 입을 닫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다 종종 흔치 않은 기회가 찾아오면 준비되지 못한 감상과 생각의 흐름이 두서없이 터져나오다가 뒤엉키며 그 귀한 기회를 허무하게 소모해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내 상황이나 감상이 어떤 적확한 말로 설명되고 묘사된다는 것만으로도 응어리가 해소되고, 나아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언젠가는 작정하고 의도한 건 아니었어도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까지도 주는 나였는데, 요즘은 일단 나부터 그런 위로를 받기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관계와 예산이라는 기준으로는 풍요로워진 삶이, 그 축을 시간과 위로로 바꾸면 정확히 원점대칭으로 가난해보이는 건 착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