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여겨질 때, 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지각될 때,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근원거리Urdistanz”는 손상된다.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Alteritat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distanziert 하는 초월적인 예의Anstand를 창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한 의미에서 말 건네기Anrede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anrufen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anreden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얼굴은 타자성, 즉 거리를 요구하는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離隔性, Abstrandigkeit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오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들끼리는 지금까지도 쭉 많이 친하지만, 우린 그냥 적당히 친한 채로 '오래된'것에 비중이 쏠린 쪽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동네에서 처음으로 각각 베이스와 드럼을 연습하며 꽤 친했었다. 그러다 대학 때부터 생활반경이 갈라지며 자연스레 멀어졌다. 요즘엔 중학교 친구 두어 명과 함께 넷이서 반기에 한 번쯤 연례행사처럼 보는 정도. 서로 나이 먹는 걸 간신히 체크하는, 나이테 친구.
살면서 본, '기능적으로' 똑똑한 걸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머리 좋은 녀석이다. 나보다 똑똑한 놈이 똑똑하다고 인정할 정도. 외모는 평범하고, 성격도 평범하면서 적당히 무뚝뚝하고 가끔 좀 엉뚱하다. 글로 배워서 몸으로 익히는 걸 기계적으로 잘한다. 이를테면 노래, 농구, 헬스 등을 중고등학교 때 '배워야겠다 - 글로 읽는다 - 몸을 글로 읽은 그대로 굴린다 - 끝' 이런 프로세스로 뚝딱 해치우는 끔찍한 녀석이었다. 옆에서 보던 우리도 참으로 가성비 좋은 학습지능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공부는 나랑 비슷하게 하다가 고2 때 걔가 이과를 가면서 갈렸다. 대충 서로 문이과에서 각각 몇 등 - 십몇 등을 오락가락하는 정도였다. 나중에 듣기로 동네에 또래 아줌마들 사이에서 나와 이 친구를 비롯한 몇몇을 두고, '학원 하나 제대로 안 다니고 어디까지 박박 올라가나 보자'하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평소엔 축구, 농구를 하고 놀다가 학교 끝나면 밤 열두 시까지 베이스와 드럼을 패면서 놀았고, 주말엔 그 셋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나는 그걸 구경하면서 놀았다. 그러다 시험기간이 되면 그냥저냥 하던 대로 각자 알아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냥 그렇게 됐다. 얘는 그 와중에 기어코 서울대를 이과 찬스, 아무 전공이나 턱걸이, 지균 찬스 등으로 오만가지를 동원해서 찢고 들어갔다. 본인 의지와 별로 상관없는 학부 전공을 대충 신나게 놀면서 마무리하더니 대학원 갈 때 개고생을 해서 치과의사가 됐다. 6주에 한 번씩 원서로 2천 페이지가 좀 넘는 분량의 시험을 4년 내내 보는 동안 뇌가 토하는 것 같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얘한텐 우리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중고등학교도 우리와 같은 곳을 다녔다. 전형적으로 무뚝뚝한 오빠와 오빠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 싹싹하게 잘 챙기다가 수틀리면 샤우팅 치는 캐릭터였다. 공부는 그닥 소질이 없었는데 그림을 잘 그렸다. 매번 시험 끝나면 연습실에 와서 자기 오빠랑 나한테 평균이나 등수를 물어보고 '너네 둘 다 재수없어' 하고는 지 친구랑 나가서 떡볶이 사 먹고 들어오던 게 기억난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내가 보기에, 나이와 무관하게 그냥 얼굴 테 자체가 좀 아줌마처럼 생겼다고 생각해서(...) 친구 여동생을 두고 친구와 긴장관계가 생길 일은 없었다. 마침 여동생인 걔의 다른 친구가 나 좋다고 매일같이 난리 생쇼를 벌이는 중이었어서(이해하기 어렵다) 여동생이 나를 좋아할 일도 없었다.
초등학교 5-6학년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진 거의 매주 몇 번씩 보다시피 했다. 어차피 제 오빠와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니까, 학교 끝나면 우리 연습하는데 따라와서 이런저런 걸 챙겨주고 거들면서 놀았다. 그때도 밴드 마스터이거나 베이스를 치면서 리드보컬도 겸했던 나한테 물도 따로 떠다 주고, 이런저런 날 되면 제 오빠랑 똑같이 챙겨줬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어렴풋하게 여동생이 한 명 더 있는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20대에 전문대부터 무려 두 번의 편입을 기어이 성공시키더니, 요즘은 우리 홍대 근처에 화실 하나 차려서 제 오빠보다도 돈을 더 일찍부터 많이 벌고 있다. 작년쯤 결혼했고, 그 남편도 우리랑 동갑인 뭐시기 개발자라는 것 같다. 하필 코로나가 초반에 가장 극성일 때 거의 가족 결혼식처럼 결혼하는 바람에, 나조차도 직접 가진 못했다.
걔네 어머니는 우리 엄마와 20년 이상 친구다. 요즘은 우리끼리보다도 어머니들끼리 더 친한 듯하다. 한 달에 두어 번은 본다는 것 같다. 우리 강화도 집에서 농산물도 자주 사 가시고, 온 김에 논이랑 밭 구경할 겸 놀다 가시기도 하고. 착하고 딱히 허세 없는 사람이다. 손재주가 좋고, 뭔가 배우는 걸 부지런히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상황에 비해 기이하게 태평해 보일 때가 종종 있긴 하다.
본인과 남편의 귀농이 망해서 집을 좁힌다던가, 부부가 동시에 심각한 지병에 걸려서 딱히 소득도 없고 나가는 돈만 엄청 늘어나는 등등의 시점에도 굳이 경매로 나온 아파트로 재테크를 하겠다고 또 빚을 진다던가(자식들 등골을 뽑는다던가), 형편이 기울고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렵게 아픈데도 사람들이랑 모임에서의 씀씀이는 별로 줄지 않는다던가, 그 몸을 이끌고 굳이 또 뭘 배우고 발표나 공연을 한다느니 등등. 엄마가 본인 친구의 안타깝고도 의아한 행동을 나한테 푸념하듯 말한 걸 20년 치 종합하면 이렇다.
처음엔 답답하다고만 생각했으나, 언젠가부터는 1. 저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2. 저 사람을 그나마 살게 하는 원동력은 저것이다. 저걸 못하게 하면 오히려 더욱 시름시름 앓을 것. 정도로 생각하게 됐다. 그래도 딱히 엄마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고, 저런 것만 굳이 끄집어내서 드잡이를 하지 않는다면 서로를 일상에서 의지하며 살뜰하게 잘 챙기는 친구니까.
아버지는 살면서 본적이 별로 없다. 아내들끼리 그 정도로 왕래가 잦으면 남자들끼리도 친할 법 하지만, 피차 별로 코드가 맞지 않았는지 그닥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던 시절까지 롯데 계열 식품회사에서 관리직으로 일을 했다고 들었다. 우리가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첫 회사에 들어가고 내 친구가 치의대학원을 갈 때쯤 명퇴를 했다.
학창시절에 가끔 엄마가 긴 시간 아줌마와 얘기를 하고 와서 대강 아빠한테 흘리는 얘기를 들어보면 상당히 거칠고 까다로운 아재였던 것 같다. 무뚝뚝하고 다혈질이며, 먹는 건 아무리 상다리를 부러지게 차려놔도 거의 활어회나 기이한 특수부위 같은 것만 사다가 먹고, 자주 싸우고, 그때마다 밥상을 엎거나 뭘 집어던지고 부수거나,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은 아줌마가 멍든 걸 가린 채 나왔다고도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보는 그 남매를 마주하면서 괜찮은지 조금씩 의식했지만, 정작 걔네들은 티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꼰대들이 으레 그렇듯, '아들'인 데다가 돈 안 들여도 전교 몇 등씩 뻥뻥 공부 잘하는 아들내미인 내 친구는 하늘처럼 떠받들었다고 한다. 반대로 아무리 살갑게 애교가 많아도 지지리 공부 못하는 친구 여동생은 맨날 쿠사리만 주고.
그러다 명퇴 이후 갑자기 안성 쪽으로 내려가서 귀농을 하겠다며 20년 가까이 살았던 우리 옛 아파트의 옆 단지 아파트를 팔았다. 그전까지 농사에 단 1도 관심이 없던 아저씨라, 우리집에서 보기엔 좀 걱정을 했더랬다. 그러더니 처음 하는 농사인데도 빚과 정부 보조금을 한계까지 땡겨서 대형 하우스를 끝도 안 보이게 여러 개를 지었다. 그런 다음 외국인 노동자 열댓 명 굴리면 알아서 돈이 나올 줄 알았나 보다. 그렇게 세팅만 해놓고 매일같이 인부들에게 윽박만 지르고 술만 마셨다고 했다. 종종 우리 부모가 바람 쐬고 놀러 갈 겸 그 안성 농장에 몇 번 들렀다. 아빠가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고, 아줌마는 지역 농협마트 매대에 농산품을 밀어 넣어서 그나마 팔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딱히 생산이나 판로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채 3년이 안 돼서 당연하게도 망했다. 농사가 그렇게 간단하게 꿀빨기 쉬웠으면 우리 집은 벌써 강남에 빌딩 샀겠지, 아마.
결국 귀농했던 모든 자산을 정리하고 그나마 지인들 연고라도 있는 우리 동네로 다시 이사 왔다. 모든 걸 다 팔아서 은행빚을 갚고 나니 예전 아파트로는 돌아올 수 없어서 약간 변두리의 빌라로 왔다고 했다. 몇 번쯤 팔거나 나눠줄 농산물 갖다 주거나 집에 고장 났다는 걸 봐주러 우리 부모가 저녁 마실 겸 가본 바로는 거실이고 방이고 너무 좁아서 이삿짐도 제대로 못 풀고 반쯤 창고처럼 산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애들(내 친구와 친구 여동생)이 와봐야 잠은커녕 제대로 몇 시간 앉을자리도 마땅히 없단다. 어차피 내 친구는 대학원에서 레지던트쯤이었고, 군대 대신 뒤늦게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느라 천안에 방을 구하고 나와 살고 있었다. 어쩐지 다들 그나마 거리도 중간이고 아직 사는 사람도 절반쯤 있는 이 고향 동네에서 만나도, 본가가 있는데도 굳이 술 마시면 대리를 끌고 집에 가더라.
그렇게 반년-1년쯤 지나서 아저씨는 동네 변두리에 있는 어느 공장의 현장관리직으로 다행히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데 채 2년을 못 가서 간이었나 위암 때문에 병석에 덜컥 누웠다. 그때쯤 설상가상으로 아줌마도 신장에 생겼던 문제가 커져서, 투석을 시작하며 이식을 기대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남은 건 좁디좁은 빌라 전세밖에 없는 상황에 둘 다 누워버린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화실을 차려서 좀 먼저 돈을 벌던 친구 여동생이 생활비를 커버했고, 큰돈이 들어갈 땐 아직 전문의가 되지도 않았지만 대출 하나는 미리부터 끝내주게 잘 나오던 내 친구가 마통과 대출 상한을 끝까지 박박 긁어가며 틀어막았다. 그렇게 4-5년, 지금이 되었다. 아줌마는 아직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더 이상 투석에 쓸 혈관이 거의 안 남아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고, 아저씨는 초회차 완치 이후 재발한 암이 전신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셨다. 친구 여동생이 재작년쯤 결혼하고 올해 애를 낳았다. 다행히 손녀는 보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쯤부터 강화도에 있는 엄마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다. 위독하셔서 임종 준비 중이라고. 그날 밤에 돌아가셨고, 다음날 친구가 부고를 알리기 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 당사자를 제외한 세 명으로 톡방을 새로 파고, 시간을 맞춰서 첫날 저녁에 장례식장을 찾았다. 아직 옛것과 요즘 것 그 사이 어딘가를 사는 우리는, 이런 순간에 항상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혹시 모를 정도까지 준비는 한다. 옛날처럼 밤새 손님이 밀어닥치고, 일부러 상주 가족들 슬플 틈도 없게 혼 빼놓는다고 밤새 놀아제끼면 그 술상 내보내고 치우고, 그냥 자리라도 지키고 등등. 어차피 요즘은 상조회사가 출장뷔페처럼 싹 다 알아서 하고, 상주 가족들도 밤 열두 시 근처쯤 되면 다 퇴근하듯 쉬러 가는 것도 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특히 저들 부모의 최근과 주변을 봤을 때 오히려 자식인 내 친구의 동료나 대학원-대학 친구가 거의 다 일거고, 사람이 없어서 자리를 채우는 역할이 더 클 것 같기도 했다.
조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서 익숙한 그 메뉴의 한 끼를 먹었다. 친구와 나를 기점으로 이런저런 공통지인들 한둘이 우리 모임에 더 붙어서 두런두런 사는 얘기나 하고 있었다. 상주인 친구가 왔다. 와줘서 고맙다며, 이런저런 다른 스몰토크나 잔뜩 한다. 원하는 위로의 코드는 그쪽인가 보다. 두 시간 반쯤 있다가 남들이 다 빠지고 좀 지나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동네로 왔다. 왠지 술을 마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구태여 집에 들러 차를 놓고 갔는데, 다른 애들은 차를 끌고 오는 바람에 인형이 차를 타고 왔다.
오면서 20년간 같은 그룹임에도 어쩐지 엠바고 걸어놓은 것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우리가 들은 버전의' 그들에 대한 20년 치 밀린 팔로업을 해줬다. 인형이도 대강 눈치로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상주 친구가 하드코어 난이도였다며 놀란다.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답답할 정도로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거였나 보다 하고. 본인도 느꼈단다. 호상('호상'이라는 건 애초에 없기도 한 거지만)이 아닌 것 치고는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그렇게 무겁게 흐르지도 않았던 이유. 어른들은 아마 더하겠지만, 이 나이쯤 되면서 일이든 친분이든 혼례 못잖게 장례도 무수히 다니다 보니, 슬슬 그런 온도의 차이가 감지되긴 한다. 역시나 나만 느낀 건 아니었다.
그 20년 치의 엠바고는 정작 나와 상주 친구 둘 사이에는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엠바고로 남을 것이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부모나 다른 가족끼리도 아는 이런 사이에는 두 개의 비슷하지만 다른 타임라인이 흘러간다. 각자가 당사자로서 서로 직접 알고 있는 서로의 상태와, 가족들끼리 말이 섞이면서 재구성되는 서로의 상태(혹은 주변)는 때때로 꽤 다르기도 하고, 반대로 맞춰지지 않던 퍼즐의 조각이 되기도 한다. 그걸 우리 피차는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직접 설명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백그라운드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게 대강은 무엇인지도. 그래도 그 엠바고를 지키면서 두 개의 타임라인을 별개로 치부하는 게, 피차를 들춰내서 상황에 대한 회한과 기타 감정들을 읍소하는 번거로움을 제치고 오래 볼 수라도 있게 하는 걸까.
굉장히 싫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느끼는 이 친구와의 거리가 항상 인형이보다 멀었다. '당사자로서 얼마나 당사자인가'라는 걸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항상 느끼고 확인하게 되니까. 그래도 타협하기로 했다. 진솔하게 일대일로 당사자인 1인칭을 꽝 부딪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다 날려버리면, 내 주변에 남을 사람은 스무 명도 안될 테니까. 안 그래도 사람을 자꾸 날리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호크룩스가 하나씩 깨지는 느낌이야.
장례 둘째 날이 지나고, 마지막 발인으로 넘어가는 전날 저녁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운구를 도와줄 수 있냐고. 내가 안 그래도 뭔가 쎄해서 그걸 물어보려다 말이 없길래 말았는데, 그걸 이제서야 말하냐고 핀잔을 주려다 말았다. 발인이 월요일이라 나와 친구들은 급하게 사후반차같은 사전반차를 갈기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돌아가신 아저씨의 친구라는 늙수그레한 양반들이 둘, 친구의 대학원 후배라는 애가 하나, 그리고 우리 셋이 어색하지만 인사를 나눴다. 아저씨들이 '젊은 양반들이 월요일부터 출근도 미루고 이렇게 꼭두새벽같이 달려오기 힘들었을 텐데, 고맙다'라고 했다. 우리 젊은 양반들은 '그래도 당연히 와야죠'라고 응답했다.
마지막 추도의식인 발인예배가 끝나고, 상주인 친구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 매제가 영정을 들고, 그 뒤에 우리 운구하는 사람들이 따라 서서 나갔다. 이제 추모와 애도라는 이 버퍼마저도 영영 끝나버린다는 물리적인 표현이었다. 시간이 잠시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식장에서 운구차량으로의 첫 번째 운구는 거리랄 것도 없었다. 웬만한 멀티플렉스 쇼핑몰보다 세 배는 커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한 이대서울병원은 시스템과 동선마저도 완벽하게 효율적이었다. 엘리베이터부터 차까지 스무 걸음쯤 운구했나.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저씨 마지막으로 뵌 게 최소 11년은 된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쉽네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저씨의 여동생(내 친구의 고모)으로 보이는 사람 혼자서 '이제 가면 언제 오냐'라고 우는 소리가 났다. 언젠가 어디에서 읽기로, 그런 것 역시 사실상 여러가지가 고려된 의례적인 행위양식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런 게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저런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지나치게 쓸쓸할 것 같아. 가는 사람뿐 아니라, 남겨질 사람에 대한 위로도 필요하니까.
유족 버스와 별도로, 운구하는 우리는 각자 차를 끌고 알아서 화장터로 갔다. 상주 친구 여동생이 자기 베프라며 발인에 따라온 동창이 화장터 갔다가 나오는 차편이 마땅치 않다고, 화장터까지 갔다 오는 길을 챙겨달라고 했다. '얘도 우리 중학교 나왔어, 오빠 후배야!'라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랑 이름이다. 이래저래 사람도 많고 엇갈릴 일도 많아 보이길래 전화번호를 주고, 그나마 초면에 푼수 같은 실수를 안 할만한 인형이 차에 태웠다. 그리고 나는 가장 푼수 같은 놈을 마크했다. 나중에 화장터에서 상주 친구가 '처음 보는 애를 인형이처럼 어려운(?) 애랑 태우면 어떡하냐'라고 웃으며 핀잔을 줬다.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출근행렬은 어마어마하게 막히는데,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은 묘하게 막힐 듯 막히지 않았다.
화장터에 모두 도착하고도 거의 한 시간 가량 차례를 기다렸다. 상주 친구는 화장터 건물 내부를 여기저기 미어캣처럼 쫑긋쫑긋 삐쭉삐쭉 관찰하며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쟤는 학교에서도 저랬고 , 여행 가서도 저러더니 여기서도 저러네. 붙잡고 커피나 마시러 가자고 끌고 올라갔다. 대학원 후배라는 애랑 우리 셋까지 다섯이서 아아 하나씩 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뭐하고 먹고 사는지, 각자 상주 친구랑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그놈의 골프 얘기, 기타 등등.
그러다가 상주 친구가 이런 얘기를 대뜸 꺼낸다. '내가 그냥 너희보다 몇십 년 먼저 겪으면서 느낀 게, 형제가 있든 없든 진짜 오롯이 혼자가 되어서 감당할 게 많더라. 일단 뭐 그리 고르고 싸인할 게 너무 많고(ㅋㅋ). 동생도 있고 매제도 있는데, 발인하고 영정 들고 맨 앞에서 나갈 때는 심지어 엄마도 날 어떻게 해줄 수가 없이 그냥 내가 혼자라는 느낌이 되게 크게 들었어. 근데 한편으로는 동생이라도 있으니까, 매제도 있고 해서 확실히 다행이기도 하고. 매제는 사실상 사돈이 아니라 나랑 똑같이 삼일장 한 거야, 되게 힘들걸 쟤도. 근데 너(나)만 형제가 없는데 어떡하냐 ㅋㅋ' 나는 그래서 '그니까 니들이 나한테 잘해(?)'라고 했다. 거의 항상 잊고 사는데, 나만 외동이구나 여기서도.
그쯤 얘기를 하다가 더워서 바람도 쐴 겸 다 같이 건물 앞으로 나왔다. 운구차량과 짝지은 버스의 행렬이 세 줄로 열다섯 군데가 넘게 줄을 서있다. 그제서야 가끔 통계 숫자로만 보던 '1분 만에 전국에서 몇 명이 태어나고 죽는다'는게 체감됐다. 진짜 공장처럼 어마어마하게 들어와서 저 절차를 마무리하고 또 빠져나가고 하는구나. 혈관처럼 수없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차들을 보면서, '저 하나하나의 인생에는 무슨 얘기가 있을까, 그리고 저 한 사건에서 수십-수백 명으로 남겨진 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까' 그런 상상을 했었다. 누군가한테는 별일이, 전체로 보면 그냥 있을법한 일이고, 그냥 있을법한 일이, 누군가한테는 굉장히 별일이고.
우리 차례가 오고, 운구차량에서 화장터 안으로 두 번째 운구를 했다. 이번엔 좀 길었다. 건물 로비와 홀도 길고, 화장로도 안쪽이라 꽤 한참을 가야 했다. 하얀 천으로 덮인 관을 들었다. 천이 살짝 펄럭이다가 관에 딱 붙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하게 관에 매직으로 쓰인 글씨가 보였다. 아까는 못 봤던, 친구 여동생의 익숙한 글씨체였다. '아빠 사랑해요'. 눈물이 핑, 심장이 쿵. 이 등신. 어릴 때는 남이 보기에도 무안할 정도로 본인을 그렇게도 무시했고, 커서는 거꾸로 등골을 신나게 빼먹으면서 속만 썩이던 아버지가 뭐가 좋다고. 그러면서 눈물이 핑, 심장이 쿵. 화장로 앞에 도착하고, 관이 안으로 들어가며 쇠로 된 주차장 문 같은 게 닫혔다. 이제 육체의 흔적은 끝이다. 끝의 끝인 건가. 가장 앞에 있던 상주 친구가 뒤로 돌아서 우리를 봤고, 고생 많았다면서 다들 피곤하고 바쁠 텐데 얼른들 가보라고 했다. 장례식장만도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이 와봤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화장터에 운구까지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익숙해져서 좋을 것도 없지만,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지기 어려운 경험.
오는 길에 친구 동생의 베프를 챙겨다가 근처 지하철 역에 내려줬다. 포켓몬 카드겜의 국제 심판을 본다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다시 셋이 모여서 어중간한 아침시간에 제일 만만한 순대국집으로 갔다. 타이와 셔츠를 살짝 풀고 한숨 돌리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순대국을 먹었다. 먹으면서 피곤이 풀리면서 다시 피곤해지는 이 느낌은 뭐지. 그냥 이게 마치 장례를 끝마치고 털어내는 그런 리추얼인 것처럼. 근처 카페에 들렀다가 헤어졌다. 다들 반차를 썼다기엔 너무 오전이 많이 남은 시간이었고, 난 그냥 그대로 출근하면 한 시간도 안 늦어서 반차가 딱히 필요 없어지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양심에 털이 덜 난 우리 회사는 반차를 반려하고 대충 알잘딱으로 넘겨줬다.
하루쯤 지나서 상주 친구가 단톡방에 인사를 남겼다. 고마웠다고, 조만간 만나서 맛난 고기나 먹자고. 여태껏 그렇게 딱히 내색하지 않고 견뎌왔듯, 지금도 그렇게 의연해 보이는 친구다.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이르게 찾아온 친구의 부친상. 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 뭐 그리 고결하고 퍽 칭찬받을 삶이었는지와는 별개로 그가 남는 이에게 남긴 것.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남는 이가 받아야 할 위로. 두 개의 비슷하고도 다른 타임라인이 잠시 엇갈릴 때. 그런 사이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