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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사먹자

Neon Fossel 2024. 11. 25. 01:03

라고 할 뻔. 수육용 고기와 약간의 새우젓을 제외한 김장의 모든 재료가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건 다분히 양날의 검이다. 좋은데, 굉장히 고되고 불편한 과정을 감내해야 누릴 수 있는 장점. 이미 각종 온/오프라인에서 보편화된지 꽤 된 '절인 배추'. 그 한마디가 축약하는 노동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직접 밭에서 칼로 배추를 뽑고, 다듬고, 뽀개고, 절이고, 뒤집고 = 4인가구 세 집 정도 분량에만 성인 3~5명이 붙어서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 사이에 김치 속에 들어갈 오만가지 재료들을 한무더기씩 썰고 버무리느라, 절이고<->뒤집고 사이에도 그닥 쉴 여유는 없다. 진짜 이쯤되면 사먹자, 라고 할 뻔.

 

그나마 신기한 건 다수의 예상과는 다르게 재료 준비, 재료 양으로 간 맞추기, 버무리기 등등은 거의 아빠가 다 한다. 엄마 시켰다가 여기저기 몸 아프면 그게 피차 더 고생이다. 엄마는 합창단 공연 있다고 거의 다 끝날때쯤에야 부리나케 왔다. 이쯤되면 참사랑인가. 사실 그렇지만도 않은게 애초에 이 아저씨 본인이 그냥 김치 너댓가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사람이라 그런 거 같기도 하다. 답내뛰 같은 그런 거지. 답내뛰. 근데 대충 눈대중으로 하는 것 같은데도 매년 김치 간을 기가 막히게 맞춘단 말이지. 생긴 거나 평소 성격이랑 안 어울리게 저런 걸 참 잘한단 말이야. 저 산적같은 아저씨는.

 

나는 앞서 몇번 밝혔듯,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저런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별로 가치를 잘 모르고 살고 있다. 김치든 버섯이나 다른 좋은 식재료든 넘쳐서 발에 채이는 제철과일이든. 있으면 먹고, 본가에 한동안 못 들러서 없으면 사먹거나 그냥 굳이 찾지 않는 편. 그래서 사먹는 김치나 음식중에 맛이 재밌는(?) 친구들이 있으면 먹기 전부터도 확실하게 알긴 안다. 그래도 내색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적당히 먹을만은 한 맛이고, 이것도 사람 먹으라고 만든건데 뭐 별탈 있겠나 싶으면서, 자리의 분위기를 굳이 해치고 싶지 않으니.

 

물론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정말 심각하게 맛이 없거나 김치의 분류 및 정체부터가 확립이 안 된(...) 상태일 때. 근데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구랑 있는지, 그 장소와 시간이 더 중요할 때. 그땐 그냥 생수에 돌을 말아서 먹어도 그게 무슨 상관일까.

 

간혹 농가의 부모들은 아들을 소처럼 여기는 측면도 종종 있을거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포근할 주말인데, 놀기는 커녕 연락이고 뭐고 받을 새도 없이 일만 하다가 저녁에 고열량+고지방 식단으로 밀어넣어지고는 기절했다. 그래도 큰집의 육촌 형을 봐도 그렇고, 우리 세대부터는 이 고생을 굳이 여자친구나 와이프가 같이 하게되는 건 원천차단이 되긴 하는듯 하다. 형도 인사치레 없이 순수하게 일만 하러 와야할 땐 차라리 서울 집에 식구들 다 놔두고 혼자 와서 후루룩 일하고 소처럼 밥먹고 몇시간 기절했다가 간다(...).

 

소 같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