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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 새로운 것은

Neon Fossel 2025. 3. 10. 00:07

아마도 지배계급과 종교에 동원된 예술과 기술을 제외한, 유사 이래 거의 모든 창작물이나 창작활동은 '또 재탕이냐, 베꼈냐'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마치 2천 년 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라고 했다는 것처럼. 조롱과 억까의 역사는 유구하며 반복된다. 아주 중요한 종특이니까.

 

그렇다면 모든 물적, 정신적인 '근본'을 따져서 극단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원을 진행해보자. 우주의 엔딩이 빅크런치일지 빅프리즈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출발점만은 아직 빅뱅으로 합의하고 있다면, 모든 것의 근원은 면적과 부피조차 없는 빅뱅의 바로 그 한 점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앞선 재탕, 베꼈냐는 논란에는 다 이렇게 반박이 가능하다. 빅뱅의 바로 다음 프레임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재탕이고 베낀 건가? 다른 쪽으로 뒤집어보면 '근본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요리로 생각해보자. 어떤 음식에 감자라는 흔한 재료가 들어갔다고 해서, 혹은 '삶기, 으깨기'라는 조리법이 사용됐다고 해서 이런 요소가 들어간 모든 요리를 서로 베꼈다고 하진 않는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기초적으로는 음정간격부터, 좀 큰 단위로는 시대적인 사조나 구성 등. 그런 것에 함께 속해있거나 그런 요소를 사용했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두 가지 예에서 '베꼈다, 표절이다'라고 여겨지는 경우는 무엇일까. 재료와 방법뿐 아니라 결과물까지 똑같이 찍어내고는 이름표만 바꿔 달기. 우린 그걸 표절이라고 인식한다.

 

언젠가 언급했던 플라톤의 '이데아'론, 혹은 존재론을 여기에 접목시켜볼 수 있다.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는 완벽한 삼각형의 정수(essence), 정의(definition)가 있다. 그걸 이데아(idea)라고 부르기로 하자. 존재론적으로는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음' 100퍼센트, '없음' 0퍼센트인 상태. 그리고 '있음과 없음'을 on-off, 0-1이라는 불연속적인 binary로 인식하기보다 스펙트럼상의 상대적인 위치, 혹은 섞이는 비율, 즉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해 보자. '있음'만 100퍼센트인 삼각형의 이데아에서 점점 '없음'이라는 축의 방향으로 비율을 섞으며 옮겨가다 보면 어느새 삼각형은 모서리가 살짝 뭉툭한 짱구의 삼각김밥이 되었다가, 곡선과 무늬도 휘황찬란한 삼각 언더웨어가 되기도 한다. 둘 모두 삼각형의 이데아에서 정도는 달라도 꽤 멀어져 있지만, 우린 그럼에도 그 형태를 '삼각', 혹은 '삼각형'이라고 인지하고 부른다. 삼각형의 정수는 그대로인 채 없음(삼각형이 아님)의 비율과 방향(텍스처)에 따라 표현형이 다를 뿐이다.

 

삼각형의 이데아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에만 치중해서, 정말 도형 하나만 그렸다고 해보자. 잘 쳐줘야 '그래서 어쩌라고' 이상의 평가를 듣기 어렵다. 반면 짱구의 삼각김밥과 언더웨어를 생각해보자. 이 표현형, 즉 결과가 세상을 묘사하는 다양함에 도움이 되거나, 혹은 현실 이외의 세상이나 기존과 다른 접근법을 상상하도록 가능성을 열어줄 때, 우리는 그것이 사용한 이데아만 보고 '저걸 베꼈다'라고 하기보다는 그 표현형의 유의미함을 보고 '새롭다'라고 한다.

 

재료와 개별 방법 자체만으로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다양한 방향성과 텍스처, 그리고 그것들의 조합된 결과인 표현형으로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