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유토피아에서 신나게 1년 가까이 놀고 있을 때였다. 언젠가부터, 길드원 기반 영웅 골팟이나 길레 신화 등에서 잡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코치’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흑화 시작이었다. 골팟에서 가끔 문제가 생기면 길드원 선수한테 뜬금없이 마이크로 쌍욕 빼고 온갖 억울한(?) 피드백을 다 퍼부어놓고는, 길드채팅으로만 ‘일부러 글로벌 인원들 듣고 간접적으로 찔리라고 괜히 한 소리니까 신경쓰지마세요’라고 둘러댄다. 처음 타겟이 된 몇몇은 ‘그래, 길드 기반 골팟에서 길드원 싸고돌다가 사사게 가느니 차라리 이게 낫지’라면서 넘어가줬다. 근데 그게 매주 희생양이 둘 셋씩 나오면서, “그냥 자기 스트레스 풀 샌드백이 필요한거 아니냐, 대놓고 말할 용기는 없으니까 엄한 사람한테”라는 섭섭함이나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길레 신화에서도 사람을 억울하게 죽일듯 조져서 손발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화나고 부끄럽게 해놓고는, 끝나고 나서야 “아까는 분위기 다잡고 잘하자는 차원에서 그런 거다”라고 둘러댄다. 핑계만 살짝 바뀌었을 뿐, 같은 짓이었다. 그때부터 길드기반 영웅 골팟 선수자리나 길레 신화 인원에 펑크가 나기 시작했다. 손절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다. 그래도 그 시점이나 심지어 대규모 길탈이 일어난 결말의 순간까지도, 내가 아는 한, 적어도 내가 있던 자리 기준으로는 뒷담이나 모의는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손절하고 나가는 사람들마저도 자기 하나 때문에 그 판 자체가 엎어지게 하고싶진 않았단다. 그래도 대놓고 길탈까지 가는 경우는 없이 길레만 손절하는 거라, 사태의 심각성을 그닥 인지하지 못하고 안에서 부터 무너져가고 있었다.
비슷한 기간, 길마 부길마 부부가 쐐기 고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코치, 빵, 에이블, 나, 쪼꼬 이런 멤버들한테 주차단수 아래부터 차근차근 쐐기를 배우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항상 접속하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던 길마, 부길마, 코치가 어딘가 구석에 캐릭을 모아놓고 인사를 하거나 받지도 않고 조용하다. 길드원 몇몇이 이상하다는 얘기를 하며 낌새를 느끼고 있을때쯤이었다. 그 셋이서 길드관리자챗에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했던 채팅을, 관리자 등급이었던 나와 서너명의 다른 사람들이 봤다. 길드원 누가 접속하면, 그 길드원 레이더를 검색해보고 자기들 셋이 가려는 쐐기 던전이나 단수에 적합한지 재고 따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사도 받지 않을 정도로. 더 괘씸한 건 ‘괜히 길창에 돌 링크하거나 말 섞었다가는 이상한 사람 끼고 가야된다’라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걸 목격했을 때였다. 누구보다 정감있고 따뜻하고 재밌어서 의지했던 사람들이었다. 더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셋에 더해, 반고정 같은 멤버에 내 친구, 내가 와우를 가르쳤던 쪼꼬가 있었다.
쪼꼬랑 얘기를 해봤다. 그녀석은 심플했다. 그냥 단수에 맞춰서 사람 구해서 놀러가는 게 뭐 대수냐고. 그건 맞다. 우리가 봉사활동 하려고 게임을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길창에 공개구인 안 하는 건 그렇다 치고, 아예 사람들 들고나도 아는척도 안 하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건 자긴 잘 모르겠단다. 또다시 대수롭지 않다는 식의 대답. 벽에다 대고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어이없음과 괘씸함에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지만, 일단은 한 번 접고 넘어갔다. 니가 같이 어울려 노느라 아직 몰라서 그런 거겠지.
새벽쐐기팟에서, 길드원들 주차 도와주고 글로벌에서 학원팟 열심히 짜던 ‘빵’님이 왠지 시큰둥했다. 달라란에 가만히 서서 멍때리다가 접종하는 경우도 종종 나왔고. 다들 조심해서인지 뒷담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축 처지는 게 이상했다.
그러다 다시 길레 신화 날이 됐다. 나는 어차피 글로벌에서 올주황 로그는 다 찍고 와서 딜로그 욕심은 없으니, 딜과 아예 관계없는 이감, 쫄딜 특임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길레 영웅이랑 신화에서 미터기 2등 밑으로 내려가본 적이 없었다. 미터기 보는 눈이 있다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길마,부길마,코치 3인방을 보는 게 구역질나도록 싫었지만, 저들에게도 시간과 기회를 주고, 저들이 신나서 미쳐날뛰는 게 좀 진정되면 관리자로서 얘기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 날, 안토 신화 5넴 이오나를 잡던 날이었다. 이번엔 내가 타겟이었다. 딜파이랑 가장 거리가 먼 특임인 걸 뻔히 알면서, 네 시간을 내리 놀렸다가, 윽박질렀다가, 다시 놀렸다가. 사람을 가지고 논다. 처음엔 웃으면서 받아줬다. 어차피 해병대에서 먹으면 바로 죽는 것 제외하고 모든 더러운 걸 억지로 먹어봤고,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들어서는 안 될 욕설과 모욕을 다 당하면서도 미치지 않고 돌아왔다. 네까짓 것들이 긁어봐야 우습다. 그저 차갑게 괘씸할 뿐이다.
길레 신화가 끝나고, 원래는 길드디코에 남아서 레이드가 어땠는지, 쐐기 갈사람 있는지 떠드는 게 일반적인데, 그냥 디코를 나왔다. 코치가 뭔가 찔렸는지, 갑자기 내가 디코를 왜 바로 나갔냐며 길챗이랑 귓으로 찾는다. 씹었다. 나는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달라란에 서서, 초보시절 이후로 스카웃 제의와 친추를 받으면 받았지, 단 한번도 웃음거리 근처에도 가본 적 없던, 미터기 앞에 누가 있는 게 낯설던, 내 빛나는 주캐릭을 응시했다. 룩변에 크게 관심은 없고 귀찮아하면서도, 하나씩 하나씩 힘들게 구해서 입힌 법사 캐릭의 고귀한 갑옷과 무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능력과 명예,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부당하게 비웃음당했다. 모욕이었다. 머리와 가슴이 차가워졌다. 스스로 모니터링하기로, 불끈 달아오르는 지점을 넘어서 차가워졌다는 건, 화가 나도 많이 났다는 거다. 역시나 군대를 거치면서 장착한 스킬이다. 본래 이 차가워지는 지점에 다다르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는 게 아니라, 가장 냉정하고도 아픈 반격이나 해법을 차근차근 준비하거나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때라도, 거의 일 년쯤,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저 셋만 생각하면 두 시간 만에 실제 길드원 100명짜리 길드를 공중분해 할만한 데이터가 담긴 스위치를 누르고 싶지만, 내가 처음으로 좋은 기억을 갖게 해줬던 곳이다. 잘 되라고 응원하고 싶진 않지만, 폐허가 되는 꼴은 보고싶지 않았다. 조용히 하룻동안 짐을 쌌다. 그리고 길탈 당시에 접속중인 사람들 중에 건질 사람들에게 친추를 했다. 오히려 항상 길드에 같이 붙어있으니 딱히 친추가 필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 막상 따로 나가려니 친추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일단은 접속중이던 예닐곱 명을 건졌다. 그냥 개인사정으로 길드를 나갈 것 같다고만 둘러댔다. 길마한테는 쐐기팟을 뒤에서 가려받는 것, 길레 영웅 신화의 문제점들을 감정 싹 빼고 귓말 두 줄로만 요약해서 보내고, 나간다고 간결하게 인사했다. 그런 게 맘속에 있었으면 진작 얘기를 하지 그랬냐고 반문한다. '그럼 레이더 검색하고 관리자챗으로 낄낄거릴 시간에, 일단 사람들 인사부터 받고 관리자들 귓말에 대답부터 하셨어야죠'라고 입을 틀어막으려다가, '아쉽네요'라고 무성의하게 대답하고 말을 끊었다. 길드창에는 그냥 고맙고, 사정이 생겨서 나간다고만 했다. 쪼꼬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기회를 줄만큼 주었다. 그러고도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 혹은 '부작위'라는 스탠스로 선택한 건, 저런 인간들이었다. 이게, 너에 대한 내 대답이다.
길드 없이 혼자 하거나, 길드가 없으면 약간 Geek처럼 보이니까 1인 창고길드라도 파거나 할 생각이었다. 친추를 받았던 사람들은 친추할때까지만 해도 '설마 진짜 나가겠어'싶었다가, 길탈을 하니까 여덟 열명한테서 귓말이 솟구친다. 진짜 나갔냐고, 솔직히 왜 나갔냐고, 나가면 어떡하냐고. 미주알 고주알 뒷담까듯 말하기 싫어서 그냥 허허 거리면서 둘러댔다. 길마랑 부길마랑 코치에게서도 각각 귓말이 온다. 일단 대뜸 미안하다, 그리고 전해 들었는데 그런 문제점을 느꼈으면 말을 하지 그랬냐 등등의 반복. 당신들은 말을 할 기회조차도 주지 못할 정도로 야멸차게도 바빴고, 그와중에도 나는 사람들을 다독거리면서 당신들에게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여태껏 이 길드를 사랑해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냥 삭히면서 당했던 사람들의 입장이 똑같이 되어 보니, 알겠더라. 대화의 가능성 자체를 담지하지 못할 폐급의 인간들이라고.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사실은 이렇게 성의있게 까고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여태껏 마음이 다쳤을 사람들에게. 그들을 그저 뒤에서 다독거리기만 하고, 앞서서 더 싸워주지 못한 게, 내가 투박해서 그 심각함을 몰랐던 것 같고, 와우를 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유로 스스로 자꾸 뒤로 물러섰던 게 바보같고, 그래서 미안했다. 관리자로서, 친구로써.
그렇게, 내 첫 유토피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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