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덜기

200430_Meomory dump

Neon Fossel 2020. 5. 2. 10:44

날이 좋다. 아버지는 시골갬성을 충전하러 새벽같이 강화도로 사라진지 오래. 연휴인지도 모르고 시작된 연휴라, 음감이랑 총감한테 진짜 연휴동안 안 건드릴 거냐고 재차 물었다. 자발적인 파트별 소그룹 연습은 있어도, 편곡 소환해서 곡 뜯을 일은 없을걸?이라는, 정말 확실하게도 불안한 대답을 들었다. 그래. 배 째.

 

경력자 실무면접이 고도화 되면 어디까지 괴롭힐 수 있는지 익히 안다. 조금씩이라도 건드려 놓으면서 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 모니터를 여덟 개 정도의 창으로 도배했다. 월스트리트와 세계은행, IMF 등에서는 벌써 코로나 이후에 대한 전망이 쏟아진다. 의외의 조류다. 코로나 때문에 억지로라도 경기를 부양하려고 잔뜩 내려놓은 이자율과 각종 경기부양책이, 미래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독이 될거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현재를 최소한 버티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들이, 결국 미래 경제의 안정성과 건전성을 무너뜨린다. 타격은 피해갈 수 없었다. 미래를 끌어다 써서라도 현재를 버텨야 했던 것이다.

 

집에서 영화를 봤다. 점점 ‘좋음’이 폭발하는 듯한 날씨에 못 이겨서 엄마가 몸을 뒤튼다. 벨라시타에 가자고 했다. 그러고도 두어시간을 밍기적거리다 배고픔을 못 참게 되었을 즈음 출발했다.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일탈이 소박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같은데서 피자랑 파스타 먹는 거라던 양반이, 오늘따라 얼큰한 한식이 땡긴단다. 아무래도 장소 선정을 잘못 한듯. 그나마 무난한 낚지볶음밥을 먹고 카페 테라스에 앉았다. 작년 가을 아버지 생일 때 시골 일이 바쁘니 굳이 고모들을 불러서 모으지 않은 것 때문에, 그게 엄마에게 섭섭했던 둘째고모와 아직도 냉전중이라는 것을 시작으로 속풀이 썰이 이어진다. 저녁 약속 전에 기분 좋게 햇살 쬐면서 밥이랑 커피를 마시는 그림을 상상했는데, 이 지지부진하고 지난한 얘기라니. 듣는둥 마는둥 했다. 그랬다가 내심 미안해졌다. 저렇게라도 얘기해야 풀릴만큼 속이 응어리져있을텐데, 아들이라는 놈은 허수아비처럼 멍때리고 있다니. 그래서 뒤늦게라도 열심히 들어줬다.

 

야외에 꾸며 놓은 조형물에서 사진도 찍어드리고, 그 앞의 꽃집들과 거리를 산책했다. 거리 전체를 유럽풍으로 도배해놓은 곳이다. 엄마가 좋아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새삼 와닿았다. 엄마는 유럽풍, 팝송, 외국 음식, 문학, 영화 등을 좋아하는 ‘소구성’만 있다. 평소 생활에서는 별로 가까이 할 기회가 없거나 그럴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그보다는 ‘무조건 한식, 시골 같은 자연, 트로트, 영화는 졸려서 잘 안보는’ 아빠의 영향이 클 거다. 로맨틱한 그도 고질적인 취향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구모델의 한계쯤으로 치부하자. 가끔 엄마의 친구 모임 두 세개에서 저런 취향을 소소하게 같이 즐기긴 하는데, 그것도 한가할 때 얘기다. 요즘은 가까이에 두고 즐긴다고 하기엔 거리가 매우 멀다. 딸 같은 아들이라는 얘기를 안팎으로 듣는다는 게, 스스로를 방심하게 만들었나. 딸 같은 아들이라면 엄마를 이렇게 방치하진 않았을 거다. 최소한 멍때리는 시간이 반나절이라도 난다면, 미루지 말고 잘 해드려야 겠다.

엄마와 나는 알고 있다. 어차피 살림을 분리해서 나가고, 내 가족이 생기면, 내 가족 챙기면서 내 일상을 버티기만 하더라도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모를만큼 정신없을 거라는 걸. 엄마도 그 시절을 겪었고, 그래서 기대함으로 지치게 하기보다는 기대하지 않겠다고 재차 말했었다. 그래서, 그 전에라도 종종 시간을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언젠가 할머니에 대해 썼던 글이 떠올랐다. 스무살 무렵 결혼해서 평생을 논이랑 밭에서 보낸 사람. 취향, 취미, 교양이라는 단어는 인생에 단 한켠도 내어줄 여유와 필요를 동시에 느끼지도 못 했던 사람. 그 할머니가 요즘 신기하게도 예쁘게 잘 그린 그림을 보고 들었던 생각을 쓴 글이었다. 그 할머니에게도, 그리고 엄마에게도, 할 수 있는 한 아름다운 현재들을 선물해야 겠다. 매년 한 번씩은 하는 다짐이지만, 올해는 왠지 그 색깔과 무게가 다르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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